취미든 직업이든 수십 년 한 길을 걸어온 이에게는 뭔가 남다른 것이 느껴진다. 문봉동 ‘노뎀공방’의 박승수 대표도 그랬다. 40년 나무와 함께 살아온 그의 모습에서 장인의 예기(藝氣)와 뚝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목공을 천직으로 살아온 긴 시간이 그저 평탄하기만 했을까?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지난한 삶 속에서 아내가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는 박승수 목수와 그의 아내 김미숙씨를 만나 보았다.
어린 나이에 배운 목공일, 천직으로 생각해
박승수 목수는 아홉 남매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났다. 하지만 넉넉했던 집안이 아니었기에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 목공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모부가 당시 김포에서 목공소를 운영하셔서 그곳에서 목공을 배웠어요.” 오랫동안 목공일을 해온 고모부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컸다.
“대부분의 장인이 그렇듯 고모부도 장인정신이 투철한 분이셨어요. 저에게 작은 연장 하나 다루는 일에도 항상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엄하게 가르쳐 주셨죠.” 그 가르침 덕분에 나날이 기술도 늘어갔고 목공이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박승수씨.
그렇게 기술을 익힌 후 20대에 서울 중곡동의 ‘동원 성구사’라는 곳에서 처음 일을 하게 됐다. 성구(聖具)는 교회 예배에 쓰이는 강단이나 의자를 만드는 것인데 교인이었던 그에게 마음의 평안도 주고 보람도 있었단다. 꼼꼼한 성격이다 보니 무엇을 만들던 잘 만들려고 성심을 다했고, 차츰 그의 성구 제작 솜씨도 입소문이 나 4년 후에는 친구와 성구사를 차려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사업은 잘 됐지만 건강에 이상이 왔어요. 목공을 하면서 화학 도료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페인트 냄새에 기침과 알레르기 증상이 계속 됐죠. 나무는 좋았지만 페인트 냄새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성구 사업을 할 수 없었어요.”
홍수와 IMF 등 연이은 악재로 어려움 겪어
어쩔 수 없이 건강 때문에 친구에게 성구사를 넘기고 가족이 있는 일산으로 요양 차 이주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둔 가장으로 마냥 쉴 수만은 없어 다시 ‘로뎀 성구사’를 차리게 됐단다. 다행히 예의 꼼꼼하고 탁월한 기술이 알려지면서 성구사도 차츰 자리를 잡고 번창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1998년 고양시에 큰 홍수가 나 지하 작업장이 물에 잠겨 큰 손해를 본데다 설상가상으로 IMF까지 터졌다. “자리를 잡을 만하니 악재가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을 때 정말 참담했죠.” 그때 충격이 심해서 2달 간 일을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었다는 박씨.
이때 그에게 큰 힘이 돼준 이는 아내였다. 원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의 아내는 늘 웃는 얼굴이 트레이드마크. 아내라고 속이 편할 리 없었겠지만 늘 웃는 얼굴로 그를 지켜준 것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됐다고 고마움을 전한다. 연이은 악재 이후 부부는 식당 경영 등 다른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항상 목공일에 가 있었다는 아내는 “저 몰래 아주 작은 공간을 빌려 나무를 만지고 있더라고요.(웃음) 그러니 어쩌겠어요.”
홍보담당 아내, 남편의 문짝 수리 전문 장점 블로그에 알려
남편의 속마음을 확인한 후 아내는 남편이 다시 목공일을 하도록 도왔다. 그렇게 목공방을 열게 됐지만 운영은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사람들이 알아야 찾아오잖아요. 남편은 자기 일만 할 줄 알았지 그런 일엔 아주 무뎌요. 기술자의 자존심만 세다고 할까(웃음). 그런데 아들 셋을 데리고 살려면 장인정신만 갖고 되나요.” 생각다 못한 아내 김씨는 마침 고양시에서 운영하던 온라인 창업교육에 참여하게 됐고 그곳에서 블로그 활용 방법을 배웠다. “오십 가까운 나이에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이 쉽겠어요? 하지만 열심히 했어요. 하다보니 블로그를 활용해 홍보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처음엔 남편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지청구를 주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타공인 ‘노뎀공방’의 열렬 홍보담당이다. 남편 박씨는 나무로 만드는 모든 것에 능하지만 몇 안 되는 문짝 수리 전문가로 인정받는 이이기도 하다. 문화재 보수 작업의 문 복원 일을 하기도 했고 국무총리 공관의 문짝 수리를 맡아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아내 김씨는 남편의 이런 기술을 블로그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돌고 돌아 다시 천직이 된 목공일, 이제 자부심으로 일해
블로그를 운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울산에서 견적의뢰가 왔다. 반신반의하면서 견적은 내줬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는 부부에게 한 달 후 연락이 왔다. 그 일을 시작으로 박승수 목수 하면 문짝 수리 전문가뿐만 아니라 나무로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를 물려 쓸 만큼 튼실하고 꼼꼼하게 잘 만든다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문짝 수리는 사실 그리 큰 이익은 없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하면 또 좋은 인연으로 다시 의뢰를 하시더라고요.”
박 목수의 가구나 인테리어 철학은 남들과 다른 특별한 방법은 없다. 단 두 가지 원칙이 있는데 하나는 제작에 있어서는 무조건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목공을 처음 가르쳐준 고모부의 영향으로 제작하면서 아주 조금이라도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절대 소비자에게 내놓지 않는다. 두 번째 원칙은 소비자의 의뢰가 들어왔을 때 절대로 '안 된다'라거나 '못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의 디자인, 수종, 색상 등을 모두 맞추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 두 가지는 목공방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지킨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2년 전 부부는 공간을 넓혀 지금의 문봉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부부는 가구, 리모델링, 토털 인테리어 등 나무로 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는 ‘노뎀공방’으로 자리 잡게 됐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인삼각 경기를 하듯 한 발 한 발 마음을 맞추며 ‘노뎀공방’을 운영해 온 박승수, 김미숙 부부. 앞으로 수공(手工)의 전망도 희망적이라 생각해 아들들에게도 적극 권할 수 있었고 최근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공방에 합류해 큰 힘이 되고 있다고 한다. ‘노뎀공방’에 있는 것들은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한다는 부부는 성경에 뜨거운 햇살을 가리고 그늘을 만들어 사막의 나그네들에게 쉼터를 제공했다는 로뎀 나무처럼 ‘노뎀공방’을 키워가고 싶다고 한다. http://blog.naver.com/nodem612, 010-5264-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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