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수상이력이 있는 동명의 EBS 다큐시리즈를 도서화한 ‘문명과수학’은 수학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교과서적인 역사책이 아니기 때문에 빠진 문명(바빌로니아,중국문명)들도 있지만, 수학사의 전반적인 주인공격인 이집트문명, 그리스문명, 인도-아랍문명에서 발생한 수학의 기원과 미적분을 비롯한 근현대 수학의 발전상을 꽤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그리고 교육적인 측면을 위해서 역사적인 내용속에 수학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요소들을 꽤나 포함시켰고, 또한 부록을 통해서 각 장에서 언급하는 수학적인 내용들을 한번 더 보충해가기도 한다.
이 책에서 수학은 인류가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언어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1부에서는 먼저 수의 개념은 이집트 문명에서 시작된다. 생존의 필요에 의한 막연한 셈의 단계를 넘어선 수를 의미한다.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는 왕국 경영에 필요한 지식이 수학이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1650년경 이집트의 서기 아메스는 견습생을 위한 기하, 산술문제집을 파피루스에 필사했다. 이는 왕국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2000년 전부터 내려온 것들이 적혀있다. 바로 수학으로 각종 다각형과 원 등 도형의 넓이와 부피를 구하는 법 그리고 단위분수의 계산과 일차방정식 풀이 등을 포함해 모두 84개의 문제가 담겨있다. 당시 수학은 고위 관리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신들 중 나일강의 여신 히피는 인간에게 수학을 하도록 만든 신이다. 그녀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집트에 홍수를 일으키는 신이다. 상류의 퇴적물을 하류로 옮기기에 땅이 비옥해지지만, 그 경계는 다 허물어진다. 파라오에겐 백성들한테 그들의 땅을 다시 찾아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경계를 다시 짓는 건 수학의 문제인데 그중 원의 넓이를 구해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집트인들이 원의 넓이를 구하는 방법은 지름을 9등분하여 그중 1을 버리고 남은 8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를 원의넓이로 구했다. 이는 작은 돌멩이 64개로 정사각형을 만들과 다시 배열하여 원의 넓이를 만들었을 때 지름을 이루는 돌멩이의 수가 9가 되는 식으로 실증했다. 다양한 도형의 넓이를 구하기 위해서 곱셈을 만들었고, 피라미드를 건설한 노동자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됐는데 화폐는 아직 없어서 빵이나 보리 등 곡식으로 지급됐다. 이를 분배하기 위해서 나눗셈을 만들었다. (물론 현대적 방식의 곱셈과 나눗셈은 아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원리와 치밀한 증명이 아닌 현실문제의 해결이었다. 이는 이집트수학이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도 거의 답보상태로 놓인 원인이기도 하다. 다각형들을 이용해 곡선의 면적을 구하는 착출법(소진법)이 나온 건 그 이후 17세기 미적분학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2부는 고대 그리스 문명으로 넘어간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산술과 기하를 논했고, 2000년동안 기하학의 핵심이었던 유클리드 기하학이 만들어진 건 모두 고대 그리스였다. 고대의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의 수학을 흡수한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서기들이 사용한 원리들을 명증한 언어로 끌어냈다.(증명 또는 연역) 주어진 해법에 따라 문제를 푸는 것과 그 안에 내재된 보편적 원리를 규명하려는 태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그리스적 사유체계를 예증하는 상징이다. 원론은 당시 왕이 배웠던 수학책이다.
피타고라스는 예언자이며 신비론자로 탈레스의 제자였다. 그는 대장간의 망치소리에서 길이가 2/3를 이루는 쇠막대에서 화음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세상은 정수의 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 정리의 숫자들은 그 이전 바빌론과 이집트사람들도 알고 있었지만, 피타고라스가 증명을 통해 법칙을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의 제자 히파수스가 무리수를 발견함으로써 피타고라스의 정수체계가 무너졌다. 그가 보이지 않는 무리수를 발견한 것도 증명의 힘이었다. ‘이세상은 무엇으로 이뤄졌을까?’ 에 대한 답으로 그리스인들은 자기들만의 이야기 방식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증명이다.
기하는 쪼갤 수 없는 점에서 출발한다고 유클리드는 원론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해서 23가지 정의를 나열하고 다음으로는 증명이 필요없는 자명한 명제인 공리가 나온다. 원론은 초등수학 입문용으로 만들어진 교재인데 한편으로는 체계적인 이론서이자 이후세대의 학술서와 선언문의 구성방식을 제시한 본보기이기도하다. 자명한 공리에서 출발해 부정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는 방식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 뉴턴의 프린키피아, 스피노자의 윤리학등 많은 책이 이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집트문명과 그리스 문명의 대조는 수학의 양면성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즉 현실세계의 필요에 답하는 유용성의 측면과 우주질서에 대한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질문에 답하는 철학적 측면이다. 두 문명의 수학이 이리도 다른 이유는 전자는 측량이나 상업거래와 같은 구체적인 것이었고, 후자는 우주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 갈망이다.
3부는 신을 사랑하고 영원을 믿었던 나라, 인도문명이다. 그들이 만든 숫자 하나가 인류의 역사를 바꿨다. 존재와 부재를 넘나드는 기묘한 숫자, 0은 수학을 무한의 세계로 뻗어 나가게 만들었고, 과학에게 우주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종교의 나라 인도에서 인류 최고의 발명품 0이 탄생한 내력을 추적한다. 인도는 건물에 0층이 존재하는 나라 0의 고향이다. 인도수학은 천문학적 지식이 발전하면서 엄청난 진전을 보였는데 천문학에 필요한 큰 자릿수 계산 때문에 수의 계산방법이 발달했다.
계산법뿐만 아니라 산술삼각법, 대수학, 기수법등으로 확대된다. 그중 삼각법이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삼각법은 직접 잴 수 없는 길이를 잴때 편리하다. 삼각법의 기본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들은 몇 개의 특정한 각만 알고있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인도인들이 만든 수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려면 다른 문명에서 사용되던 숫자를 살펴보면 된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모두 수가 커짐에 따라서 문자를 계속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스는 계산술을 천시하여 큰수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중국은 두자리마다 새로운 수를 만들었다. 바빌로니아는 두 개의 쐐기문자만 사용해서 60진법을 사용하였다. 60이 넘어가면 문자 사이를 띄어서 표기했지만, 이 역시 불완전했다. 약 1200년 전 인도에서 0이 발명되었는데 이것이 현대적 위치기수법을 만들어진 순간이 된 것이다. 우선 인도는 1부터 9까지 다른 수를 쓰고 새로 숫자를 만들지 않고 수하나를 덧붙였다. 이는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서 아라비아숫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7세기 브라마굽타는 인도 천문학의 중심지 우자인에서 천문관장을 했다. 당시 인도천문학은 서양을 훨씬 앞서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고 지구둘레를 실제와거의 비슷하게 계산했다. 수학은 당시 천문학의 보조수단이었는데 브라마굽타는 수학자체에 고민을 시작했다. 그가 쓴 ‘브라마스푸타시단타’에는 음수와 양수,0에 대한 사칙연산, 거듭제곱, 제곱근 구하기가 담겨있다. 대수학의 도약이다. 0이 최초로 수학에 쓰였고 0이 독립적으로 쓰인 것은 계산속에 포함되면서이다.
*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크림슨수학
이진혁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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