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갖은 주부들은 방학이 되면 자녀의 점심이 큰 걱정이다. 출근 전 밥과 반찬을 준비해놓고 ‘차려 먹으라’고 편지 써 놓고 또 전화를 해도 퇴근해보면 인스턴트로 때우거나 그대로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안타까운 엄마의 마음을 대신해 방학이면 70여명 아이들 점심상을 차리는 아파트 관리소장이 있다. 신길동 휴먼시아 5단지 구석구석을 관리하는 구현숙 소장. 그의 첫인상은 매우 시원하고 환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와 밝게 인사를 하고, 만나는 주민들 역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느라 왁자지껄하다. 행복한 밥상을 차리다 주민들과 흠뻑 정이 든 아파트 관리소장의 맛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나랑 함께 먹자
4년 전 구 소장이 처음 이곳에 부임되어 왔을 때, 방학동안 혼자 점심을 먹는 아이들을 위한 점심트럭이 있었지만 밥을 먹으러 오는 아이들은 20명을 채우기가 어려웠단다.
맞벌이 가정과 다자녀 가구가 많은 편인데 어떻게 하면 많은 아이들이 점심을 맛있게 먹일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는 구 소장. 그의 작은 노력으로 30명, 다음해는 40명 이제는 60여명이 넘는 아이들이 따뜻한 점심을 먹는다.
“밥보다 중요한 것은 소중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우선 반갑게 맞이하고 이름을 불러요. 그리고 밥을 함께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죠. 전 편식도 괜찮다고 했어요. 맛있게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느새 아이들은 자신의 형제를 데려오고 이웃집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천원을 내고 당당하게 밥과 간식을 챙겨먹기 시작했고 점점 식솔(食率)이 늘어났다.
나누어 먹다보니 이웃
구 소장은 아파트를 지은 주택공사에서 식비와 음식을 바로 조리할 인건비를 받고 소통을 위한 자금도 조금 확보했다. 그리고 봉사할 수 있는 부모님들과 조를 짜 방학 중 ‘행복한 밥상’을 점점 풍성하게 다듬어 갔다. 아빠들이 나서서 철판에 고기를 구어주고 아이들과 김밥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이웃과의 소통을 위해 부모님들과 겨울방학에는 눈썰매장 여름방학에는 수영장으로 나들이를 가기도 한다.
“이웃 아파트 친구를 데려와도 되느냐 또는 김밥 한줄 더 가지고 가서 엄마께 드리고 싶다 등 아이들은 이런저런 요구가 그렇게 예뻐요. 부모와 이웃을 생각하고 나누려는 마음이 기특하게잖아요. 아파트지만 시골동네나 골목길 같은 정서가 생기는 것 같아 좋았어요.”
부엌에서 정이 난다는 말처럼 행복한 밥상은 어느새 이웃을 만들어 갔다고 한다. 누가 아픈지 어디서 게임을 하는지 또 딱지를 누가 많이 땄는지 누가 싸웠는지 등 서로를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모두 우리 아이들이 먹는 것
밥을 먹는 아이들이 늘면서 간식을 줄여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생겼다. 하지만 지역의 단체와 주민들의 도움으로 잘 극복이 되었다고 한다. 내년에는 경기도 농림재단에서 텃밭 상자를 단지에 놓고 직접 채소를 길러 볼 예정이다.
“아이들이 늘어나자 부식 값이 부족했지만 모두 ‘우리 아이들 먹이는 일‘이라며 봉사자들이 나서고 주민들은 비록 중고이지만 냉장고를 사주었어요. 농사를 지은 채소를 가져오는 분도 계시고 아이들까지 김치를 한 포기씩 들고 오기도 했어요.”
봉사하는 주민들은 하루에 두 명씩 조를 짜 정성이 담긴 식사를 아이들에게 주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었다. 너 그리고 나 구분 없이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라는 인식이 뿌리를 내린 결과가 아닐까.
지식을 전달하는 책상도 차리고 싶다
구 소장은 점심 외에 다른 욕심을 더 내고 있었다. 오전 10~ 오후 4시까지 아이들이 함께 놀기에 충분히 넓은 식당. 이곳에서 아이들이 좀 더 유익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체험을 많이 하면 좋겠어요. ‘생각만 바르게 갖고 있으면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당당함을 갖게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구 소장은 이웃 아파트에 있는 지역아동센터와 작은 공부방을 몹시 부러워했다.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는 것 못지않게 지식을 전달하고 문화적 체험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엿보였다. 벌써 시간표와 넣어야 할 프로그램까지 생각하는 구 소장을 보며 머지않아 저 소망이 이루어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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