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단연 언어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면서 다른 동물들은 상상조차 못할 문명의 발전을 일궈냈다. 그럼 여기서 조금 다른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과연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는가. 답은 물론 아니오다. 인간은 언어 이외에도 손동작 즉 수어(手語, 수화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지난해 2월에 제정돼 8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한국수화언어법은 한국수화언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지며 농인(聾人, 청각장애인)의 고유한 언어임을 밝히고 있다. 운정신도시 주민들로 이뤄진 수화동아리 ‘손말누리’를 만나 그들의 따뜻한 손말 이야기를 들어본다.
음성언어와 수화언어는 동등한 언어
텔레비전을 켜면 뉴스 화면 하단에 수화통역사가 뉴스 앵커의 멘트를 수화언어(이하 수어)로 통역하는 모습이 보인다. 음성언어 대신에 수어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접하는 인구가 많아지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일례로 유럽과 미국에서는 정부의 주요 정책을 발표할 때 대변인 옆에 반드시 수화통역사가 동행한다고 한다. 화면 하단 작은 동그라미 속이 아니라 대변인 옆에서 카메라 투샷 화면으로 음성언어와 수어가 동시에 방송된다. 얼마전 포항에 진도 5.4의 지진이 발생해 전국민이 지진의 공포에 떨었을 때 당시 3개 공중파 방송사 중 오직 한 곳만이 수화통역방송을 내보냈다고 한다. 농인들이 일상에서 겪는 삶의 어려움을 짐작해볼 수 있는 단면이다.
농인은 소통하는 언어가 다를 뿐
운정맘들의 수화동아리 ‘손말누리’는 지난 7월 수화통역사 이명진씨의 재능기부를 계기로 시작됐다. 수화를 배우고자 해도 마땅히 배울 곳이 없던 차에 수화동아리는 운정신도시 주민들에게 신선한 모임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봉사나 호기심으로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노랫말을 중심으로 수화를 배웠는데 수화도 언어이다 보니 점차 어렵게 느끼는 분들도 계셨어요. 지금은 수화를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분명한 목표 의식을 가진 소수의 멤버들이 남아 동아리를 꾸리고 있어요.” 이명진씨가 말했다.
손말누리 회원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으로 동아리를 시작했지만 수화를 배우면서 농인에 대한 스스로의 편견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회원 김선화씨는 “흔히 듣지 못하는 농인을 청각장애인으로 부르면서 일반인과는 지적으로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실제로 수화 봉사활동을 통해 농인을 만나면서 그분들도 저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소통하는 수단이 다를 뿐 감정이나 사고방식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의료수화 봉사가 절실해
수화는 간단한 손동작으로 보이지만 수화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낱말들에 해당하는 수화언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외우듯 수화언어를 배워야 한다.
수화는 선천적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사용하는 의사소통수단이 아니다. 요즘은 후천적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청각장애를 얻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듣지 못하는 침묵의 세계에서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손말 즉 수화언어인 것이다.
수화통역사 이명진씨는 수화언어도 하나의 언어로 인식돼 대중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농인들이 가장 불편함을 겪는 공간은 병원입니다. 의료진과 언어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의료수화를 하는 봉사자가 매우 시급한 실정입니다.” 손말누리 회원들은 방과후수업이나 유치원, 재능기부 수업 등을 통해 수화교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수화를 배우는 것이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 인식되고 대중화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누군가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느낌
손말누리 회원들에게 수화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주는 기쁨과 나의 존재감에 대한 행복이 있어요. 처음에는 수화 봉사자가 돼서 착한 일을 해야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다면 이제는 좀 달라요.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서 내가 즐겁고 감사하고 행복해지는 것이죠. 수화는 주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고 할까요.”
미니인터뷰
이명진(운정2동)
작년에 국어와 동등하게 수어를 언어로 인정하는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었어요. 수어도 우리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배우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수어를 하면 청각장애인은 더이상 장애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특별한 능력을 함께 하지 않으실래요? 더불어 사는 세상, 우리 손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김선화(운정2동)
손말누리 동아리를 알고 엄마로, 아내로만 살던 저는 수화통역사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됐어요. 새로운 도전을 하는 매일이 설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미래가 기대돼요. 하루 빨리 수화를 배워서 봉사도 하고 재능기부도 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한번은 저희 아이들과 함께 농인들과 나들이를 간 적이 있어요. 그분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신 배려와 사랑에 감동해서 저희 아이들도 수화를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김미영(교하동)
경기도에서 주최하는 수화경연대회에 파주시 대표로 참여한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으로 농인들을 만났는데 그분들과 수화로 대화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고 그것이 제게 강한 동기 부여가 됐어요. 또 농인들을 위한 의료수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앞으로 그 분야에서 봉사하고 싶어요.
윤세원(운정1동)
저는 농인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수화가 단순히 일회성 호기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 인식되길 바랍니다. 수화가 더욱 대중화돼서 농인과 청인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고, 서로간에 이질감이 사라졌으면 합니다. 농인들도 우리와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란 걸 알아주었으면 해요.
태정은 리포터 hoanhoa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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