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은 반월산업단지의 배후도시 안산시가 태어난 해다. 올해로 서른 한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안산시. 그런데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의문점. 왜 경기도 반월출장소는 반월시가 아닌 안산시가 되었을까? 안산시로 승격할 당시 안산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군면이 폐합되면서 안산군은 없어지고 수암면, 군자면, 반월면이 현재 안산지역을 대표하는 지명이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월공단, 반월출장소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유천형 선생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안산은 고려때부터 시작된 역사를 감추고 영영 사라질 뻔 했다. ‘일제가 강압적으로 없앤 땅 이름’ 안산을 되찾은 유천형 선생. 안산시의 서른 한번째 생일을 즈음해 유천형 선생을 만났다.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사라진 이름 ‘안산’
안산의 이름을 찾아내 바로잡은 사람은 1980년대 은행에서 근무하던 유천형 선생이었다. 안산의 대표적인 양반가문인 진주 유씨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곧 시로 승격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 이번이야 말로 안산의 이름을 찾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유 선생은 “‘반월’이라는 이름은 우리 역사에는 없던 지명이었다.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이름인데 반월시가 된다는 것은 안산이 가진 1000년 역사를 무시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가 가장 먼저 찾아 본 자료는 ‘동국여지승람’ 안산 편이었다.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세조 때 각 지역의 역사와 산물, 풍속 등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지리지. 서울대 규장각을 찾아 ‘동국여지승람’ 안산편 첫 장을 들춰본 후 그는 ‘안산’이라는 이름이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다 것을 깨달았다.
“안산 편 첫 장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안산은 고려 11대 문종이 탄생한 땅으로 충렬왕때 주군으로 승격시켰다’라고 딱 적혀 있는 겁니다. 순간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일부러 안산이라는 이름을 없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일본은 정기를 끊기 위해 명산을 찾아다니며 쇠말뚝을 박은 놈들인데 지명 이름 없애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겠죠”
끊임없는 탄원서 제출 안산 이름 되찾아
동국여지승람을 직접 눈으로 본 후 안산 이름 되찾기는 미뤄둘 수 없는 숙제가 되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당시 지명을 정하는 내무부에 ‘탄원서’를 냈다. 다들 이미 ‘반월출장소’가 만들어졌고 반월공단이라는 이름의 공업단지가 있었기 때문에 안산으로 이름을 바꿀 수 없다고 말렸지만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유 선생은 안산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없어진 이름이라는 걸 강조했다. 시로 승격하는 지금 빼앗긴 이름을 찾는 것이 바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임을 강조한 탄원서를 읽고 드디어 내무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는데 이미 반월공단으로 이름이 알려진 공단이 있어 반월이라는 지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거죠. 그때 제가 다시 제안했어요. 반월공단까지 안산공단으로 이름을 바꿀 필요는 없다. 공단이름과 지명 이름을 분리해서 사용한다면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는 제안까지 첨부를 했어요. 다행히 내무부에서 긍정적인 답신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원활한 일 처리를 위해 당시 여당에도 탄원서를 제출해 지명을 새로 만들어지는 도시의 이름을 ‘안산시’로 해 줄 것을 청원했다. 선생의 노력 덕분에 1986년 승격된 우리시는 드디어 ‘안산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아이들에게 고향 사랑하는 마음 심어주길
안산시로 승격된 후 유천형 선생은 자신의 호를 ‘경(竟)안(安)’으로 지었다. 마침내 안산을 찾았다는 뜻을 담은 호다. 안산 이름 찾기에서 시작된 유 선생의 안산 사랑은 안산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지키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은행에서 정년 퇴임 한 후 성호이익 선생, 최용신,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등 안산이 배출한 인물들의 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지역사에 대한 열정으로 안산시 문화원장도 역임했다.
유 선생은 요즘 안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안산을 ‘신도시’라고 부르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는 “안산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장이다. 아이들에게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사랑하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 것은 자존감을 키우고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아이들 손을 잡고 고향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적지나 박물관을 찾아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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