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지역내일 2017-04-18

야탑고등학교 이재현 교사 


“선생님, 2027 프로젝트 기억하세요?”
한 달 전의 일이다. 졸업한 지 꽤 된 제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듬직한 목소리 속에 가려진 잊지 못할 제자 A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반가움에 서로 안부를 묻고 이어 A는 ‘2027 프로젝트’를 기억하냐고 물었다.


밤새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 와서 엎드려 자던 A군
‘2027 프로젝트’ 잊을 수가 없다. 10년 전 2학년 담임할 때 일이다. 아이들은 학년 초 처음 보이던 서먹함과 경계심을 버리고 슬슬 까불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런 잉여의 행동은 건조한 수업 시간에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다수의 아이들은 무난하게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해 가지만 간혹 우려되는 아이가 눈에 띈다. 대부분의 학생이 공부 못지않게 친구 사귐에 열심일때 유독 말없이 심드렁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이내 잠만 자는 아이가 있었다.
A는 오늘도 지각이고 아이들과 대화도 없이 여전히 엎드려 자고 있다. 이 아이에게는 정말이지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혼도 내보고 달래기도 했지만 그 어떤 방법도 먹히지 않았다. 밤새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 와서 말도 없이 그저 잠만 자는 A에게는 고기 냄새와 여러 냄새가 찌들어 있었다. 조회 시간엔 없어서 스트레스 받고, 막상 있으면 엎드려 잠만 자서 속 터지고. 숱하게 혼내고 달래고 내가 가진 에너지의 대부분을 이 아이에게 쏟아 부었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퇴를 하겠다며 어머니까지 모시고 왔다. 나는 무조건 자퇴는 안 된다고 막았다. 그간 들인 노력도 아쉬웠지만 무엇보다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고민을 아이들과 공유하니, 자치가 이루어지더라
그런 A가 달라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달라졌다. 아니 당시엔 그냥 자퇴를 못하게 하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달라졌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내 노력보다 다른 아이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소통을 위한 노력이 더 큰 몫을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A가 달라지고 나니 교실 분위기 전체가 달라졌다. 다른 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것을 보며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1년 치 말썽을 A가 한 달 만에 소모해 준 탓인지 이후 기간은 담임교사로서 여유마저 느껴졌다.‘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여유 속에 점점 눈에 들어오는 모든 아이들이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유 있게 아이들을 대하니 아이들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학급 일에 더욱 자발적인 태도를 보였다.
산발적인 지각 문제를 고민하였더니 아이들 스스로 학급 회의를 열어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더니, 이후에는 수업 분위기 개선 문제까지도 스스로 해결하는 과정과 결과를 보였다. 담임 생활 10년에 이런 수준의 학급 자치는 처음이었다.
‘직업은 자아실현의 장이다’라는 교과서의 말이 몸으로 이해되었다. 즐거우니 빨리 지나간다고 했던가! 순식간에 1년이 지나가고 종업식 날이 되었다. 헤어짐이 아쉬워 작은 기념품을 준비했고 거기에 2027이라고 새겼다. 수학여행 때 어떤 학생이 아쉬움에 이대로 나중에 한 번 더 수학여행을 가자고 한 것을 떠올려 20년 뒤의 수학여행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새긴 것이다. 이렇게 2027년 수학여행을 약속하고 아이들을 한명 한명 안아주며 떠나보냈다. 졸업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울면서 2학년 3반 교실을 떠났다.


녹록치 않은 고등학교 생활을 이겨나가는 힘은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

한 달 전 2027을 추억하게 하는 전화가 A로부터 온 것이다. 20년을 기다리려 했으나 도저히 못 참겠다고 올해가 중간인 10주년이니 중간 점검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약속 날까지 보름 남짓 기간을 기다리며 정말 들뜬 마음으로 새 학년의 업무를 즐겁게 해낼 수 있었다.
약속된 날 20여명이 모였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예전 이야기를 하며 10년 만의 변화에 놀라고 즐거워했다. A는 자퇴를 막아준 선생님의 믿음과 친구들의 끊임없는 관심에 자신이 달라질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고2 때 모습에서 훌쩍 커버린 20여명의 28살 제자들 사이에서 나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헤어지며 남은 10년 뒤의 약속 중간인 2022년에 또 한 번의 이벤트로 우리는 2학년 3반 교실에 모여 짜장면을 먹기로 했다. 2027프로젝트의 중간 정거장이 마련된 것이다.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이번 약속은 더 더디게 올 것 같다. 5년, 10년 뒤의 내 나이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빨리 그때가 와서 32살, 37살의 우리 아이들을 봤으면 하는 기대를 하며 지금 이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 


‘영국 끝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영국 끝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현상 공모하였고 당선작으로 뽑힌 것이‘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친구들로 인해 A가 힘든 시기를 무사히 이겨냈던 것처럼, 지금 이 아이들도  녹록치 않은 고등학교 생활 속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익혔으면 좋겠다. 여기에 좋은 친구를 만나 서로를 격려하며 선의의 경쟁 속에 실력마저 갖춘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얘들아,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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