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한 내 유년의 기억은 작은 화단과 우물, 나무냄새로부터 시작한다. 집 앞에는 제법 큰 버드나무가 있었고, 그 그늘 아래 친구들과 부드러운 느낌의 가족이 있었다. 아마 그때 나는 그만큼 행복했었는지 모른다. - <그리움, 그 마른 상상력> 책머리에.
지역 문인의 책 한 권이 찾아왔다. 시인이자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정우 작가(미래교육연구소장)가 수필집 <그리움, 그 마른 상상력>을 펴냈다.
이번 수필집은 30여 년간 이어온 작가의 문학적 감성을 정리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정우 작가는 “떠나버린 것들, 잊힌 것들은 늘 그리움으로 남는다. 그 그리움을 기억으로 좀 더 오래 붙잡고 싶었다. 추억의 사립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보는 단편적인 생각들, 우리 삶의 긴 그리움들을 가슴 속 단락으로 엮어보고 싶었다”는 말로 수필집을 소개했다.
-. 수필집은 언제부터 준비해왔나
천안문화원에 있으며 문화 발전을 위한 촉매 역할을 주로 해오는 동안 나 자신을 드러낼 생각은 못했다. 어느 순간 글을 써온 30여년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편 한 편 탈고를 하며 문학적인 매듭을 맺고 또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으로 등단했기에 많은 이들이 수필집 출간을 놀라워했다. 수필을 굉장히 가벼운 글로 평가절하 하는 것이 늘 마음 아팠다. 신변잡기를 담는 글이라고 하니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인생을 관조하고 사색하며 사유하는 깊음을 담아 보이고 싶었다.
-. 그리움을 마른 상상력이라고 표현한 제목이 오래 남는다. 어떤 의미를 담았나
누구나 갖고 있는 어렴풋한 기억 속 풍경은 세월이 갈수록 휘발되고 건조해진다. 어쩌면 오히려 더 생생하기도 하다. 그를 담고 싶었다. 반어적인 의미도 담았다. 어차피 우리 인생사가 다 그리움이지 않나. 사람은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어 누구나 끊임없이 외롭고 그리움을 갖는다. 하지만 결국 함께 있어야 존재 가치가 있다. 그것을 그리움으로 함축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 문장이 간결하고 단어가 정밀하며 상징적이라는 평가가 많은데…
표현을 함에 있어서 구구절절 나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물을 깊이 바라보고 사색하고 사유해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면 부연 설명이 없어도 오히려 명확하다. 깊이 바라보면 그 자체보다 이면을 바라볼 수 있다. 정확한 표현과 단어만으로도 모든 묘사가 가능하다. 굳이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다. 글이 아름다우려면 간결해야 하고 단문이어야 한다.
예쁜 단어만 골라 모아놓고 잘 쓴 글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튀고 글을 흐트러뜨린다. 글과 단어의 분해와 조립을 반복해 깊은 표현을 하는 것이 수필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 글에 등장하는 천안의 옛 모습을 반가워하는 이들도 많다. 반응은 어떤가
주변 지인들이 동시대의 추억을 공감할 수 있어서 굉장히 반가웠다는 말을 한다. 얼마 전 사촌형님이 전화를 해 “천안의 옛 모습이 툭툭 튀어나오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그때를 그대로 다시 바라보는 듯해서 고맙다”고 하더라. 다들 그리움을 안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그저 개인의 외로운 그리움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있음을 알게 되니 책을 보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 앞으로 어떠한 계획을 세우고 있나
이번 수필집은 문학적인 매듭의 의미를 갖는다. 이제 또 새로운 걸음을 내딛고 있다. 등단을 시로 했고,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시의 문학적 행위를 좋아한다. 호흡을 가다듬어 시집 한 권을 내는 것이 문학적 바람이다. 존재의 의미를 찾고 모두에게 귀함을 일깨워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시를 통해 세상과 공감하고 싶다.
시를 담은 수필에서 찾게 된 한 때, 그리고 슬며시 미소
“아무튼, 허드레 것처럼 쓰는 기억 속 낯설지 않은 그곳 풍경이, 우리네 빛바랜 지난 추억이, 새록새록 자꾸만 그리워지는 게 당최.” - 16P ‘구멍가게’ 중
우리는 저마다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았을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이제 아스라한 기억. 작가는 그를 굳이 마른 상상력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작가의 겸손한 표현이었을 뿐 책을 펴는 순간 상상력은 촉촉함을 넘어 윤기를 내며 반짝인다. 담겨 있던 추억은 단어 하나에 불쑥, 문장 하나에 또 불쑥 되살아나 마주앉는다. 그리움을 풀어헤쳐놓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수다가 아니어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표현이 간결하되 울림은 깊어 가벼운 일화건만 쉽사리 넘겨지지 않는다. 한 문장 읽고 먼 하늘 한 번, 또 한 문장 읽고 가을색이 담뿍 든 건너편 나무를 쳐다보고, 그렇게 야금야금 책장을 넘긴다.
작품 이곳저곳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천안의 옛 모습도 몹시 반갑다. 천안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음에도 제법 익숙해진 동네 이름이 흐뭇하니, 지금 이 시간이 언젠가 그리움이 될 것임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저 살아가는 하루, 흘러가는 시간이건만 언젠가는 그리움으로 되돌아보게 될 한 때가 될 것이기에. 익숙하게 바라보는 길, 아까운지 모르고 부르던 이름 하나하나가 다 소중해진다. 그리움이란 그런 것.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그리움이 있어 나는 지금 살아있습니다’라고.
나의 그 한 때와 모처럼 해후. 언젠가 그리워하게 될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사람. 그래서 소중한 지금. 그 모든 것이 이 가을 날, 이정우 작가가 건네는 선물이다.
이정우 작가
미래교육연구소장
천안 출생
1994년 ‘시와시론’을 통해 문단 데뷔
천안문인협회 회장. 충남문인협회 이사 역임
천안수필문학회, 백매문학회 동인으로 활동 중
천안시문화상, 충남문학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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