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을 익히는 무더위 끝자락, 한 줄기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기업인, 아모레퍼시픽그룹 서경배 회장이 ‘서경배 과학재단’을 설립했다는 소식입니다. 그 재단 설립이 유난히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서 회장은 지난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아모레퍼시픽그룹 우선주를 매각한 개인 재산 3000억원으로 과학재단을 설립한다”고 밝혔습니다. 재벌과 대기업들이 주로 회사자금으로 설립하고, 약속한 출연금조차 이 핑계 저 핑계로 국민의 눈을 속인 기업가나 정치가들과도 격이 다릅니다.
재단은 “기초생명과학 연구를 지원한다. 기초 생명과학 분야의 신진 과학자들을 매년 3~5명씩 뽑아 연구과제 1개당 최대 25억원을 준다. 100년 이상 지속될 재단을 위해 1조원 수준까지 출연금을 늘릴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 분야는 성과가 단기간에 나타나지 않아 정부와 기업이 쉽게 손을 대지 않습니다. 더구나 기업활동과 무관한 연구를 지원하는 공익재단입니다. 서 회장은 “과학의 발전은 미래를 지향하는 것, 과학을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며 순수한 설립 취지를 밝힙니다.
설립 동기도 진정한 기업가 정신을 엿보게 합니다. “성공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20년 동안 보유한 주식이 지금처럼 큰 가치를 갖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그 고마움을 표하고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재단을 만들었다”고 서 회장은 말합니다(이건희 삼성 회장에 이어 국내 주식 부자 2위인 그가 보유한 주식가치는 9조원에 이른다).
부친의 경영철학이 재단 설립에 영향을 준 사실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고(故)서성환 회장도 태평양기술연구소를 열었으며, 성지관·미지움 등 연구 시설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말하자면 93년이라는 아모레퍼시픽 역사는 줄기찬 연구와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라는 집념의 철학으로 쓰였습니다. 쉼 없이 ‘세계 속의 향과 미’라는 걸작을 만들어갑니다. 그 토양 위에 ‘서경배과학재단’이 섰고, 아모레퍼시픽은 국민기업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아모레’가 갖는 시적 운율처럼 사재를 출연한 ‘과학재단’이라는 시를 국민 가슴속에 심었습니다.
서 회장은 재단에 자신의 이름을 건 이유에 대해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고민을 거듭했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 책임감도 크게 느끼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기 때문이라고 담담하게 밝혔습니다.
천안아산내일신문 이기춘 본부장 kclee@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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