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인] 동양화가 허옥순 할머니

감염병 예방 방역활동에 주민도 참여

지역내일 2016-08-11

우울증이란 벼랑 끝에 내몰린 쉰다섯에 처음 붓을 잡고 목숨 걸 듯 동양화에 매달렸다. 대한민국 여성미술대전, 대한민국회화대전에서 21차례 수상했고 그룹전도 30여 차례 연 어엿한 화가가 됐다. 25년째 그림 그리는 팔순 노모를 위해 자식들이 특별한 전시회를 마련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잠실에 사는 허옥순 할머니 사연이다.

 송파구민회관 예송미술관에서 지난 7월에 일주일간 열린 청림 허옥순 팔순기념 가족전시회. 기품 있는 소나무 숲, 대둔산과 설악산 등 전국 명산들의 빼어난 풍광을 담은 작품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전시회 마지막 날 만난 허옥순 할머니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전시 내내 많은 관람객들이 찾은 데다 45점 중 41점이 모두 팔렸기 때문이다.

허옥순


우울증 터널에서 그림 만나다
 작품을 분신처럼 여겼기에 주변에서 아무리 졸라도 단 한 점도 팔지 않았던 그다. 올해 초 자식들이 팔순 기념 전시회를 열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림 팔아서 돈이 마련되면 좋은 곳에 쓰고 싶다고. 작품 판매 수익금을 발달장애인 가족공동체 ‘기쁨터’에 기부하기로 작정하고 공 들여 전시를 준비했다.
 “붓을 잡을 때마다 내 그림으로 남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늘 기도했어요. 막상 전시회를 열려고 하니까 그림이 한 점도 안 팔리면 어쩌나 밤잠을 설칠 만큼 고민되더군요. 정말 다행이지요. 진짜 기뻐요.”
 오롯이 자식과 남편만을 위해서 살았던 그가 그림으로 인생 2막을 열기까지는 곡절이 많다. “오남매를 모두 서울서 대학공부 시키느라 고생 많았지요. 교사인 남편 월급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해 나도 억척스럽게 일했어요.”
 직장일 보러 오토바이 타고 나갔다 뒤따라오던 차가 들이받았다. 갈비뼈, 쇄골뼈가 심한 골절을 입은 데다 내출혈이 심해 사경을 헤맸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1년을 꼼짝 못하고 누워 지내야 했다.
 “의사가 도대체 몸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부러진 뼈가 도통 붙지를 않느냐며 혀를 차더군요. 오로지 자식들, 남편 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내 인생은 뭔가, 여태 뭘 하고 살았나 후회, 분노가 물밀듯이 밀려왔어요.” 허무감이 몰고 온 우울증의 늪은 깊었다. “우울증 그거 참 몸쓸병입디다” 죽고만 싶었고 매일 밤 울며 지샜다.
 그러던 어느 날 홍익대 사회교육원이 문을 열며 사군자반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눈에 띄었다. 문득 그림 배우고 싶어 홍대 미대를 동경했던 어릴 적 간절한 꿈이 떠올랐다. 벼랑 끝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한 그는 곧바로 상경해 원서를 접수했다. “면접 때 보니 다들 전공자거나 수년간 그림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더군요. 그길로 좋은 그림 베껴 그리며 기를 쓰고 연습했지요.”
 전주에서 서울을 오가는 강행군이 매주 이어졌지만 그림에 푹 빠져 사니 행복했고 우울증도 극복했다.
 맹렬히 그림 그리는 그를 홍익대 지도교수가 눈여겨봤다. “초보임에는 틀림없는데 초보치고는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소”라며 어느 날 자청해서 청림(靑林)이라는 호를 제자에게 내려줬다. 교육생 가운데는 그가 유일했다.

전시


팔순 기념 가족전시회로 화제 모으다
 홍익대 사회교육원에서 사군자 3년, 채색화 5년, 전주대에서 한국화 14년, 우석대에서 수채화 3년 도합 25년을 우직하게 한우물을 팠다. 불현 듯 찾아온 대장암 병마와도 꿋꿋하게 싸워 이겼다.
 그의 그림은 먹의 농담을 섬세하게 조절한 원근감과 몽환적인 표현력, 구도가 남다르다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 국내 미술계에 인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가 2001년부터 대한민국여성미술대전, 대한민국회화대전, 전북미술대전 등지에서 꾸준히 수상한 건 재능을 실력으로 키워낸 우직함 덕분이었다.
 4남 1녀 자식들은 모두 각자의 가정을 이뤄 10명의 손주를 뒀다. 22명의 대가족 가운데 아들, 며느리, 손주까지 8명 그림을 그려 자연스럽게 예술인 가족이 됐다. 이번 팔순 기념 전시회 때도 가족들의 작품까지 함께 선보여 관람객들의 부러움을 샀다. 100여점 작품들을 액자 만들어 전시장에 걸고 도록 만들고 동네에 전시 포스터 붙이고 페이스북 홍보까지 모두 온가족이 합심해 전시회를 준비했다.


 ‘55세에 그림 시작한 날 봐라. 나이에 주눅 들지 말라’
 전시회 마치고 잠실 레이크팰리스아파트 자택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목숨처럼 여긴 그림들 모두 팔고 나니 허전하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 나이쯤 되면 집착이 사라져요. 내 그림이 남에게 보탬이 되니 고맙지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돌이켜 보면 오남매를 번듯하게 키우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살림에 직장 일까지 정신없이 살았죠. 그러면서도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어요. 쉰 다섯에 시작해 지금까지 그림 그리잖아요. 살림만 하느라 어느새 마흔 훌쩍 넘은 주부들에게 나이 때문에 주눅 들지 말고 하고 싶은 게 뭐든 시작해 보라고 꼭 말해주고 싶어요. 날 봐요. 붓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그릴 겁니다.” 산전수전, 쓴맛단맛 고루 맛본 여든 살 왕언니의 경험에서 우러난 한마디는 울림이 컸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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