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기온이 이미 30도를 넘었고 7월 들어서도 더위는 더 기세등등한 실정이다. 우리나라 기후가 온대성 기후에서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이미 3학년 교실은 덥다고 연일 아우성이고 학생들은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다고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잖아도 공부하기가 쉽지 않은데 기후까지 이러니 여간 힘들지 않을 것 같다. 작년에 비해서도 벌써 늘어지는 학생이 더 많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런데 꼭 이 무렵이면 10년 전 3학년 담임을 할 때 우리 반 학생이던 B군이 생각난다. 그는 학교에서도 소문난 ‘범생이’였으며, 내가 그를 본 모습의 90% 정도는 의자에 앉아 있던 모습일 정도로 항상 자기 자리에서 공부만 하던 친구였다.
우리 학교는 자율학습을 열심히 하기로 소문난 학교다. 평일 야간자율학습뿐만 아니라 공휴일에도 희망하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오후 5시까지 자율학습을 한다. 3학년 담임선생님들은 이 무렵이면 늘어지고 공부하기 싫어 꾀부리는 학생들과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다. 실제 6,7,8월을 잘 준비하는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진학 결과가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시기인 이때가 마지막 고비임을 인식하고 독려를 한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프다고 꾀부리는 아이들 몇 명이 아침부터 조퇴를 허락해 달라고 찾아왔다. 달래고 타일러서 약도 주면서 돌려보냈다. B군도 배가 아프다면서 찾아왔다. 당연히 꾀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아이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약을 주고 조금 더 참아 보라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11시가 조금 넘어 B군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도저히 못 참겠다면서 다시 찾아 왔다. 순간적으로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B군의 어머님께 전화를 드리고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B군을 데리고 갔다.
대략 증세를 말하고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급성충수염이라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순간 아찔했다. 나의 욕심(?)으로 잘못했으면 B군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지면서 등에 식은땀이 났다. 그나마 그 순간 나의 판단력(?)을 한편 다행스러워 했다.
그런데 그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B군은 그때까지 자신의 손에서 자신이 정리한 노트를 놓지 않고 있었다. 열심히 노트를 보면서 검사도 받고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아프고 게다가 수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공부를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일까? <삼국지>에서 관우가 번성전투에서 독화살을 맞고 화타에게 뼈를 깎는 수술을 받을 때, 신음소리 한마디 안 내고 바둑을 뒀다는 이야기는 읽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의 이야기라 생각했지 실제 실생활 속에서는 일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관우의 현신이 이 녀석인가 하는 생각에 순간 멍해졌다. 정말 괴물 같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B군은 자신의 노트와 함께 그 순간에도 공부를 하면서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 후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도 제일 먼저 찾았던 것이 역시 자신이 정리한 노트라는 것을 나중에 B군의 어머님께 들었다.
이 이야기는 당시 3학년과 담임선생님들에게는 전설이 되었다. 나를 포함해 모든 선생님들은 B군이 학자가 되리라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으며, 그해 무난히 B군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의 학과에 합격했다.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고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B군만은 대학에서도 모범적(?)으로 생활할 것이라 다들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들려오는 소문은 우리들의 예상과는 완전히 빚나가는 얘기들뿐이었다. 소위 우리의 B군이 클럽의 ‘죽돌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설마 하면서도 워낙 그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학생이라 몇 번 가 본 것을 과장되게 소문난 것이라 믿었다. 해마다 대학 신입생들은 스승의 날이면 관례처럼 모교를 방문해 고교 때 선생님들을 찾아온다.
당연히 B군도 3학년 때 우리 반 학생들과 찾아뵙겠다고 연락이 왔다. 정말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도 해보고 싶고 대학생활은 잘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드디어 5월 15일, 그 전(前) 해 우리 반 아이들이 10여명 같이 왔다. 그런데 그 순간 당연히 오리라 믿었던 B군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눈으로 B군을 찾고 있을 때 “선생님”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렇지’ 하면서 살펴보는 순간 내 교직생활에 그렇게 놀래보기는 처음이었다. 졸업한 첫 해에는 3학년 때 공부만 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것이 있어서 많이들 변신(?)하고 오기도 한다. 그러나 B군의 변신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번개 맞은 머리에 무지개 색 염색으로 변신한 그의 모습에서 고교 때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황한 모습을 드러내면 민망할 것 같아 애써 진정하면서 제자들을 대했다.
그리고 저녁 먹고 정해진 순서대로 호프집으로 가서 처음으로 술자리를 같이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B군에게 고3 때에는 이런 모습 이런 끼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더니 그 순간 B군의 대답은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나왔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제가 공부를 매우 좋아하는 학생으로 생각하고 계시죠. 그런데 저 정말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 죽으라고 공부했어요. 공부 안 할 수 있었으면 안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집안의 분위기나 저의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공부를 안 할 수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피할 수 없으면 고통이라도 최소화해야겠다고. 그리고 죽으라고 공부를 했어요. 공부에서 최대한 빨리 해방되고 싶었어요. 대학만 가면 공부에서 해방된다고 생각했고요. 제가 충수염에 걸려 수술할 때도 아파 죽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 다시 1년을 더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 생각하니 아픈 것도 모르겠더라고요.”
아! 그랬구나. 어쩐지. 이제야 그때의 상황이 이해되었고 또한 B군의 극기 방법이 매우 현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우리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다는 것을 B군은 이미 알았던 것이다. 즐길 수만 있다면 굳이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찾았을 텐데, 정말 피할 수 없어 할 수 밖에 없다면 고통이라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인데…….
이 이야기는 그 후 지금까지 나의 제자들이 힘들어 할 때면 늘 얘기해 주는 나의 단골 일화가 되었다.
선덕고등학교 진로진학부장 신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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