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파주출판단지 지혜의 숲, 어느 초보 아빠가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밖은 씽씽 찬바람이 불고 엄마는 안 오고 아이는 울고 있으니 대략 난감. 이때 다가간 사람이 ‘권독사’ 장경숙씨였다. 한 시간 울던 아이가 책 두 권을 읽어주자 울음을 뚝 그쳤다. 우는 아이 달래는 책의 위력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는 ‘권독사’들이 하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왼쪽부터 권독사 박종일씨 장경숙씨, 지혜의 숲 서미화 매니저, 권독사 김선규씨, 출판도시 윤여진 대리
지혜의 숲을 꾸려가는 ‘권독사’
‘권독사’란 책을 권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혜의 숲’을 꾸려가는 자원봉사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3구역으로 나뉜 길이 3.1km 높이 9m의 서가, 15만 권이나 되는 지혜의 숲 책 가운데 방문객에게 맞는 책을 알아보고 권하는 일을 한다.
‘지혜의 숲’ 권독사 모임이 생긴 것은 지난해 6월이었다. 하루 4시간 이상, 한 달에 적어도 4번 이상 봉사를 해야 한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40여 명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대학생, 직장인, 은퇴한 CEO와 가정주부까지 각계각층에서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권독사들은 하나같이 책을 사랑한다. 지난달 21일 ‘지혜의 숲’ 테라스에서 만난 권독사 모임 대장 박종일씨와 김선규씨, 장경숙씨도 그랬다.
출판단지를 아끼는 하나같은 마음으로
박종일씨는 은퇴 후 취미삼아 옛 책을 모으러 다닐 만큼 책에 대한 조예가 깊다. 헌책을 모으느라 오며가며 만난 지인들을 통해 ‘출판인들이 출판산업단지를 만들자는 모임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2002년 무렵부터 이미 듣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혜의 숲 권독사로 합류하게 된 것은 평소 오래된 책이 둘 곳 없어 버려지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던 마음 때문이었다.
장경숙씨는 은퇴 전 근무하던 회사에서 교육 파트를 맡아 청소년들과 책을 통해 소통하는 일을 해왔다.
책이 좋아 권독사를 자원했지만 정작 권독사들은 지혜의 숲을 즐기지 못한다. 4시간 동안 이들이 하는 업무는 책을 보는 것이 아닌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선규씨는 “권독사로 활동하면서 오히려 옛날보다 책을 더 못 읽는다. 보면 볼수록 좋은 책들이 많아 아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 년이 되도록 지속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아끼는 것이 책만이 아닌 출판도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기부자들의 뜻 헛되지 않기를
권독사로 봉사하다 보면 답답한 일도 많다. 관광코스처럼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사람들부터 책을 펼쳐 놓고도 스마트 폰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어린 학생까지, 지혜는 뒷전인 채 숲만 구경하고 가는 이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책이 파손되고 음료를 흘려도 모른 척하는 이들부터 혼자 다 독식할 것처럼 읽지도 못할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읽는 이들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이 이곳에도 있다.
박종일씨는 “지혜의 숲은 책 읽는 훈련을 하는 곳이 아니다. 훈련은 집에서 하고 엄마들도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기 바란다. 자기 주장하는 것 못지않게 공동체에 헌신하는 마음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워했다.
때로는 “저 위에 있는 책들은 어떻게 보라고 쌓아놨냐?”고 항의하는 이들도 있다. 김선규씨는 “저 책이 갖고 있는 의미와 문화의 냄새, 그 소중함을 먼저 보시면 그런 질문은 안 하게 될 것”이라고 답한다. 출판도시문화재단 윤여진 대리는 “지혜의 숲에는 서고가 따로 없어 여러 권 중복되는 책이 있을 때 위쪽 서가를 사용한다. 아래에 진열된 책들이 파손될 때 위쪽에 진열했던 책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수많은 나무들이 모인 숲처럼 지혜의 숲도 꼭 그렇게 파주출판도시 안에 자리를 잡았다. 때로는 잘못 길을 들어설 때도 있겠지만 걱정 마시라. 권독사들이 사람 이정표가 되어 기꺼이 길을 안내할 테니.
>>>권독사 미니인터뷰
김선규씨 “기업에서 해외 파트 근무를 하던 경력을 살려 출판도시 관광객들을 위한 영어 해설사 교육을 받은 이후로 출판도시를 사랑하게 됐어요. 요즘 아내까지 설득해 부부 권독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장경숙씨 “2013년에 출판도시문화재단 김언호 이사장님을 통해 권독사가 생길 거라고 듣고 이미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주로 토요일에 활동하는데 끝나고 오후 시간에는 인문학당에서 강의를 들어요. 좋은 분들 만날 수 있어서 기쁘고 봉사 자체가 놀이처럼 즐거워요.”
박종일씨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다 돌아가신 홍진경이라는 분이 친구들에게 ‘내 책이 흩어지지 않고 의미 있게 쓰였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어요. 그런 책들이 모두 이곳에 있는 겁니다. 지혜의 숲에는 귀한 자산들이 많아요. 일반적인 도서관과 달리 기부자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고 저마다 컬러가 다 있어요. 그걸 스스로 찾아서 즐기는 것이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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