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무슨 얘깃거리가 있을까요...’ 눈치 없는 리포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인다. 그리고 몇 번의 고사 후에 성사된 만남. 커피에 대한 조예가 나름 깊다며, 불편한 몸으로 손수 내린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핸드드립커피를 건네는 서동수 디자이너에게선 커피향 만큼이나 그윽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지역과 사람이 함께하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꿈꾼다는 자신의 블로그 소개말처럼 그의 이야기는 그 옛날 고색동에서부터 시작됐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고색동, 그래서 난 자칭 근린생활형 디자이너!
“지금은 산업단지며, 나름 개발이 됐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이 일대가 전부 서수원 평야였어요. 하늘에 맞닿아 있을 만큼 끝없이 평야가 펼쳐졌죠. 수원인구도 고작 40만 정도라 지역마다 작은 규모의 커뮤니티도 활발하게 이뤄지기도 했고요.” 수원하고도 고색동에서 나고 자라며, 지금까지도 그의 시간들은 이곳에 붙잡혀있다. 서울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할 때도 그의 꿈은 마을디자이너, 동네디자이너였다. 그리고 몇 년 전, 고색동의 아파트 상가에 소박하게 서동수디자인연구소를 꾸렸다. 드나드는 이들은 대부분 동네 아줌마들 아니면 주변의 자영업 사장님들, 그들의 명함과 홍보전단지를 만들어주며, 신나게 수다보따리도 푼다.
“고색동이 좋은 이유요? 제게 세상은 살만하다는 걸 보여준, 선물 같은 곳이에요. 장애에 대한 그늘 없이 살 수 있었던 건 부모님과 동네 분들의 편견 없는 사랑과 격려 덕분이었거든요.” 3살 무렵 열병으로 소아마비가 된 ‘서?동?수’라는 아이를 위해 고색동 온 마을은 그를 보살폈다. 그는 구김살 없는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장했고 야무지게 대학원까지 졸업한 후 지금은 근린생활형 디자이너로 돌아와 그 때 받은 사랑들에 하나씩 화답하고 있다.
‘Made in Suwon’, 수원만의 특징을 담아 디자인하라!
사랑에 대한 화답 중 하나가 바로 ‘메이드 인 수원.’ 국적불명, 여기가 저기 같은 그런 동네가 아니라 정말 지역의 역사와 색깔이 담긴 공공디자인을 입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 고색동인 줄 아세요? 예전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물이 들어오면 주민들이 물을 피해 사라졌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찾았다고 해서, ‘옛 고(古)’에 ‘찾을 색(索)’, 고색동이에요. 그래서 뻘흙도 유명했고, 벽돌공장도 2개나 있었죠. 아이들에게 이런 고향을 만들어주기 위해 제가 활동하는 수원아트니온예술인협동조합에서 ‘Before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어요. 내가 사는 동네에는 어떤 이야기와 역사가 있는지, 정체성을 찾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활동들을 모아 빅북으로 제작도 했죠.” 단기적인 활동으로 끝나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중학교 자유학기제가 본격화됨에 따라 재정비를 거쳐 동네디자인학교, 마을디자인학교와 같은 ‘학교 밖 학교 프로그램’으로 다가갈 계획이다.
벽화를 위한 마을만들기는 그만, 구성원들의 의지가 담긴 공공디자인으로 거듭나야
과유불급이라고, 마을마다 넘쳐나는 벽화는 서동수 디자이너가 가장 우려하는 수원 공공디자인의 현실이다. ‘마을만들기’하면 ‘벽화’를 떠올릴 정도로, 이쯤 되면 벽화를 위한 마을만들기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인을 통해 인근 지역의 가로환경개선사업에 참여하면서 기능성벽화를 한번 만들어보자 뛰어들기도 했지만, 정해진 시간에 결과를 내야 하는 행정적인 문제 등에 부딪혀 흐지부지됐던 경험은 아직도 씁쓸하다.
“마을 만들기라는 좋은 시도가 고착화되어간다는 느낌이에요. 결국 문화예술인들의 열정도, 참여도도 떨어지게 만들고, 물론 ‘재능기부’, ‘열정페이’라는 풍토도 열정을 퇴색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죠. 이런 경험들을 시 관계자와의 벽화 간담회(마을발전소 주최)에서 나눌 생각입니다. 지역사회의 역사와 구성원들의 의지가 담겨 있는 공공디자인이 개성 있게 자리 잡기를 간절히 바라니까요.” 그가 제안했던 염리동 범죄예방디자인을 참고한 고색동 안전마을 벽화디자인은 5분 운동, 공공에티켓을 일깨우는 주택가 생활수칙, 골목마다 가득 찼던 어린 시절의 놀이 등으로 꾸며져 참 흥미로웠다. 벽화로 그려졌더라면 골목걷기가 훨씬 즐거웠을 것만 같다.
욕심을 관리하며, 사람 속에서 자유인 ‘서동수’로 살아가고파
수원토박이 아니랄까 봐 그놈의 소명의식은 수원화성의 디자인 콘텐츠에까지 뻗었다. 수원화성만의 관광기념품이 전무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그는 무예24기, 장용영 수문장교대의식을 주제로 한 3종의 디자인상품을 만들었다. 자비로 시제품을 만들어 화성 주변에서 반응들을 보기도 했지만, 상품화까지는 현실적인 문제가 걸리더라면서 그가 멋쩍게 웃는다.
“근린생활형, 생계형(?) 디자이너잖아요.(웃음) 이걸 내 생애 완성해야 되겠다 뭐 그런 의지까지는 아니고요, 수원의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자는 생각이죠.” 사실 그의 흔적은 수원 곳곳에서 묻어난다. 학교현판, 팔달문시장 모범업소 인증사인, 공공기관의 인포메이션 디자인, 공원 안내표지판 등 고색동에서 ‘수원의 디자이너’로 범위를 확대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살면서 욕심관리가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한때 크게 기획사를 하면서 잘 나가던 때도 있었지만, 참 공허하더라고요. 이젠 외부인의 시선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동네주민과 행복하게 디자인하다가 5년 뒤쯤에는 바(bar)를 운영해보려고요.” 전혀 교집합이라곤 없어 보이는 바텐더라니..., 그런데 이유가 너무 심플하다.
“그냥 사람 만나는 게 좋으니까요.” 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는 게 좋고, 사람이 좋아 여러 모임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사람을 향한 그의 사랑을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오세중 리포터 sejoong7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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