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 여긴 어디?’ 누군가의 아내, 엄마 그리고, 며느리로 사는 우리 주부들은 때때로 정체성 혼란을 느낀다. 왕년에는 저마다 열정과 꿈을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 엄마’로 불리며 내 이름을 지우고 사는 일상이 더 익숙하다. 그런데, 그 일상의 벽을 깬 주부들을 만났다. 그녀들은 장롱 속에 깊이 묻어둔 열정과 끼를 꺼내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용인수지 주부들의 영어뮤지컬 동아리 재미(Zemic)의 ''맘마미아''를 만나보자.
영어연극놀이 지도자 과정 수강생들 모임 결성
작년 4월, 용인여성회관 ‘영어연극놀이 지도자 과정’에 모여든 그녀들. 이 강좌 수강생은 대부분 아이를 키우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주부들이었다. 평소 엄마표 영어교육에 관심이 많던 김윤경(용인 수지 풍덕천, 41)씨. “애들 영어책 읽어주는 것을 좋아해서 도서관에서 영어 스토리텔링 봉사를 해왔어요. 스토리텔링에 연극 요소를 접목시키면 더 좋을 것 같아 수강하게 됐어요.”
3개월의 입문 과정이 끝난 후, 수강생 10여명이 실전 모임을 가져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처음에는 그저 누구네 집에 모여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줄 소박한 공연을 만들어보자는 의도로 시작했다가 욕심을 내 맘마미아를 하게 됐죠”라고 윤경 씨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공연 연습 하면서 숨겨진 열정과 끼 발견
“우연히 모인 사람들 같지만 시간을 함께 하고 뮤지컬을 올리기 위해 같이 연습하다보니 모두가 내면에 열정과 끼를 모두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런 서로에게 끌리면서 이 만남은 운명이라 느껴졌죠.” 풍덕천동에 사는 이진영(36)씨가 덧붙였다.
박설희(용인 수지 신봉동, 42) 씨는 연습 과정이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영어 뮤지컬이라서 노래가사 외우는 게 힘들었어요. 악보랑 대사가 적힌 종이들을 집안 곳곳에 붙여놓고 외우고, 하루 종일 흥얼거리니 나중에는 아이들이 다 외울 정도였죠.”
모임터 하나 없는 주부들이 공연을 준비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여기 저기 카페를 전전하며 기획회의를 하고 대본을 짰다. 극을 올리자니 연습실도 간절해 연습 막바지에는 뮤지컬 학원을 잠시 대여하기도 했다. 모든 비용은 자비로 십시일반 나누었다. 소박하고 알뜰한 공연을 위해 모일 때마다 집에서 소품들을 가져와서 채워 나갔다. 지난 6월에 용인시 평생학습센터에 동아리 등록을 했고, 10월에 공연계획서를 첨부하여 용인문화재단에 대관신청을 했다. 집안에서 살림만 하던 주부들이었지만 각자 재능이 있었고 역할들이 모이면서 척척 일이 잘 굴러가 더 흥이 났다.
처음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녀들의 결말은 창대했다.
2014년 12월 13일, 용인 죽전 포은아트홀에서 주부 영어뮤지컬 동아리 재미(Zemic)의 ‘맘마미아’ 공연이 있었다. 이날은 그녀들이 주부도, 엄마도, 며느리도 아닌 배우로서 그 화려한 무대를 장식하는 날이었다. 식구들과 지인들을 조촐하게 초대한 작은 공연이었지만 그녀들의 반란은 그 무엇보다 뜨거웠고 감격스러웠다. 영상으로 그날 공연을 엿보았는데, 출연자들의 열정적인 눈빛에 한번 놀라고, 공연 전체를 영어로 끌고나가는 실력에 한 번 더 놀랐다.
주인공인 소피 역의 허수진(용인 수지 풍덕천동, 37)씨. “남편이 공연을 보더니 완성도에 깜짝 놀라며 언제 연습했냐고 감탄하더라고요. 평소에 상상할 수 없는 무대 위 제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대요. 무대 위에서 보니 6살, 9살 된 저희 애들이 저를 따라 춤추고 노래하더군요. 정말 감동스러운 경험이었어요.”
이진영 (용인 수지 풍덕천동, 36)씨는 2살, 3살 된 연년생 아이를 돌보며 연습하는 게 무척 힘들었는데, 다들 마찬가지 처지이다 보니 위안도 되고, 오히려 함께 아이들을 보면서 힘을 낼 수 있었단다. “무대 위에 엄마가 나오니까 우리 아기들이 신기했는지 마구 소리를 지르고 좋아했어요. 저희 가족에게나 저에게나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죠”라고 그날을 회상했다.
영어뮤지컬 동아리 ‘재미(ZEMIC)’는 공연 후 바로 아이들 방학에 접어들어 잠정적으로 휴지기를 갖고 있지만, 2015년도 희망찬 계획을 하나씩 세워가고 있다. 매년 1개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것을 목표로 올해도 작품을 기획할 것이고, 찾아가는 공연봉사도 하고 싶다고 한다. 혼자였으면 불가능했었을 일이지만, 모두 함께 되어 노래 부르고 춤출 수 있었던 행복. 그녀들의 행복한 반란은 올해도 계속될 것이다.
오은정 리포터 ohej06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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