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꼬맹이, 동네 할아버지 시민배우 데뷔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으로 이룬 ‘나는 배우다’

지역내일 2014-12-11

공연 D-1일 저녁. “배우가 흥이 나서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유도해야죠.”, “정중앙 무대 인사 지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세요.” 송파구민회관 무대 위에서 드레스 리허설이 한창인 배우들은 이현찬 연출자의 지적에 진땀을 뺀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이 한겨울에 찾아왔다. 시민배우들과 함께. 연극배우로 변신한 우리 이웃들의 스토리를 들어봤다.


“연극은 마약 같아요. 관객의 시선이 무대 위 나에게 오롯이 집중될 때의 짜릿함, 공연 마친 후 쏟아지는 박수의 중독성 때문에 배우를 하는 겁니다”라고 연기지도자이자 배우인 김영아 한국외대 교수가 말한다.
이런 갈채에 목마르고 숨은 끼를 쏟아내고 싶었던 보통사람들이 지난 9월 극단그림연극에 모여 시민배우 오디션을 봤다. 직장인, 주부, 취업 준비생까지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이었다.
“공들여 자기소개서를 쓰고 왜 연극을 하고 싶은 지 빡빡하게 채운 지원서를 읽으며 또 최선을 다해 오디션에 임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표정 속에서 감동을 받았어요.”라고 김 교수가 덧붙인다.
시민배우로 뽑힌 후 강행군이 이어졌다. 발성과 표정 연습 같은 연극의 기본기를 닦은 후 곧바로 배역을 정해 맹연습에 돌입했다. 프로 배우와 갓 입문한 시민배우가 한 무대에 서는 건 녹록치 않은 작업이었고 중도 탈락자까지 나오며 연습 과정 자체가 한편의 연극처럼 드라마틱했다. 하지만 여섯 명의 시민배우는 끝까지 남았다. 

배우
 
초등생 시민배우 ‘연극 통해 인내 배우다’
“연극이 재미있어요”라고 말하는 최연소 배우 최건우(초등1)군. 요정 역할을 맡은 그는 무대 뒤편 대기실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개구쟁이다. 매니저를 자청한 엄마 백은경씨는 “아들이 참고 인내하는 걸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말하며 “무대 위에서는 제 몫의 배역을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 어리지만 책임감이 뭔지를 깨달은 모양”이라며 대견해 한다.
끼가 많고 원래 뮤지컬을 좋아하는 원지후(초등3)양은 “객석에 앉아만 있다고 배우가 돼 무대에 서보니까 좋다”며 활짝 웃는다. 집에서도 틈만 나면 대사와 표정 연습을 할 만큼 열정을 쏟아부었다. “본인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무대 뒤편에서 꾹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거, 여러 배역이 어우러져야 한 편의 연극이 완성된다는 걸 실감나게 배운 좋은 기회”라고 엄마 손효영씨는 귀띔한다.


인생을 리셋한 30대 ‘꿈은 꾸는 게 아니라 이루는 거라는 자신감 얻다’
연극이 자신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는 신수미(30세)씨에게는 꿈을 이룬 사람의 뿌듯함이 엿보인다. “0대를 돌이켜보니까 허무하게 보냈더군요. 그래서 내 마음 속의 버킷리스트를 쭉 적어봤죠. 카페 사장, 춤 배우기, 배우, 여행...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게 많더군요.” 더 늦기 전에 용기 내 보려고 올 초 7년 간의 유치원 교사 생활을 접고 그는 ‘꿈 이루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고.
“처음엔 대사며 표정 연기가 어색하고 여러 사람과 호흡 맞추는 게 녹록치 않아 스스로에게 화를 많이 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무대 위에 서는 걸 즐기게 되고 연극이 재미있더군요.” 시민배우로 데뷔한 그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조만간 송파구에 카페를 열 예정이며 살사춤까지 배우는 중이다. 버킷리스트 세 가지나 올해 연거푸 이뤘다며 뿌듯해 한다.
“다이내믹하게 올해를 보낸 덕분에 얻은 게 많아요. ‘무대는 스타만 서는 게 아니구나’, ‘해보니까 되는구나’라는 자신감이 가장 큰 수확입니다. 이런 경험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 줬어요”라고 신씨는 덧붙인다.


60대 시니어배우 ‘삶의 재미, 당당한 나를 찻자’
시니어배우 서병학(68세) 어르신은 대학로 무대에도 서본 ‘중견 시민배우’. 알록달록 장식된 코믹한 무대 의상을 입고 배역에 몰입하는 그의 모습이 묘한 울림을 준다.
젊은 시절 트럭을 몰던 그는 지루한 대기 시간 틈틈이 저글링, 접시 돌리기, 요요 같은 소소한 묘기를 독학으로 익힌 재주꾼이다. 수십 년이 흘러 그때 취미로 배운 실력들이 무대 위에서 빛을 보는 중이다. “재미있어요. 친구들 중에는 골치 아프게 대사 외우느라 왜 사서 고생하냐고 핀잔도 하지만 속으로는 다들 나를 부러워해요. 더 나이 들기 전에 이렇게 무대에 서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참 잘했지요.”
이처럼 8살 어린이부터 60대 어르신까지 이번 연극을 통해 각자의 인생에서 ‘작은 산’ 하나를 넘는 성취감을 맛보았다고 입을 모은다.
세대 간의 어울림을 조율하며 이번 무대를 진두지휘한 극단그림연극은 올해 송파구민회관 상주 예술단체로 뽑힌 저력 있는 극단이다. 연출가인 이현찬 대표는 독일 유학중에 만난 인형연극을 국내에 선보인 주인공. 김영아 교수는 현역 배우인 동시에 연극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이론과 실기에 두루 능한 연극인이다.
무대의 문턱을 낮추고 생활 속에 스며든 열린 연극을 위해 그동안 어린이연극교실, 인형연극 워크숍 같은 교육 프로그램도 꾸준히 선보였다.
“시민배우와 프로배우가 함께 끝까지 완주할 수 있어 기쁩니다. 앞으로 지금까지의 연극교육 프로그램을 가다듬어 무대를 동경하는 더 많은 시민배우를 발굴해 함께 작품을 만들겁니다”라고 김교수는 말한다.


문의 : 극단그림연극 02-412-3883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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