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다. 1997년 대구의 섬유산업은 주종산업이면서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었다. 섬유산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바꾸기 않고서는 섬유의 미래가 없고, 따라서 대구의 미래도 암담한 실정이었다. 섬유산업은 중국 베트남 등 아세안 국가들이 추격하고 있었다. 경상도의 정치기반이 약한 김 대통령은 대구를 지원하고 민심을 얻고자 했다. 대구의 현안인 섬유산업을 고 부가가치 산업으로 구조전환 사업명이 ‘밀라노 프로젝트’였다. 1978년부터 10년간 8778억원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밀라노 프로젝트’의 이름도 보이지 않는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제2의 도시이다. 이탈리아 정치 중심은 로마, 경제는 밀라노이다. 1950년대 ‘이탈리아의 기적’을 이끌어 낸 도시가 밀라노이다. 원래 섬유도시였다. 패션 중심도시가 아니었다. 패션도시 파리의 하청 수주를 받는, 유럽에서는 2급 도시였다. 섬유산업을 고 부가가치의 패션산업으로 전환했다. 지금은 세계 패션의 중심도시 뉴욕, 런던,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히려 선도하는 패션 도시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대구의 섬유산업과 밀라노의 패션산업
대구도 못할게 없다. 인구는 밀라노의 2배나 된다. 섬유도시이다. 한때 대구의 합섬은 물량으로 세계시장을 지배한 적도 있었다. 경주, 안동, 해인사 같은 고도의 문화권에 인접해 있다. ‘쉬메릭’이라는 공동 브랜드를 걸었다. 화학섬유 중심의 대량생산의 섬유공장에서 소량의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전환을 시도했다. 우리는 단기간에 서양기술을 모방하여 섬유공장을 건설하여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30년 만에 서양의 산업화를 따라 잡았다. 패션은 가치이고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모방할 수 없었다. 대구는 공원의 정비, 신천의 정비, 도로의 확충 등으로 깨끗해졌고, 그 덕택으로 월드컵, 세계육상경기대회를 치렀다. 그러나 대구의 주종산업 섬유산업의 변신은 보이지 않았다. 왜 대구는 밀라노 같은 패션산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밀라노는 어떻게 명품의 고향이 됐나
패션산업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다. 가로 세로 1m도 안 되는 명품 실크 스카프는 100만원을 호가한다. 원가는 1천원도 채 안 된다. 그 높은 부가가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미의 창조에서 왔다.
어떻게 밀라노는 가능했을까? 밀라노가 가진 조건 첫 번째는 다양한 문화의 접촉이다. 창조는 다른 문화의 접점에서 일어난다. 이탈리아 북부가 150년 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 영토가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아프리카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같이 통용된다. 밀라노에는 밀라노 고유의 음식이 없고 퓨전 음식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요리가 혼재되었다. 그리스 로마의 문화유산을 한자리에 보고 느낄 수 있다. 다양한 문화가 패션으로 접목되었다. 중세의 길드, 장인기술이 바탕이 되었다. 명품은 수제품이다.
대량생산을 하지 않는다.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만든다. 심지어는 자동차도 수제품이 인기가 높다. 명품 브랜드는 고가이므로 짝퉁이 많다. 짝퉁이라도 디자인은 같기 때문에 외관으로 보아서는 진위를 구별하기 쉽지 않다.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의 봉제 솜씨로 판별한다고 한다. 누적된 손 기술이다. 다음은 근대화는 서구화의 가치이다. 세계의 근대화가 서양의 산업화 도시화를 통해 전세계를 휩쓸었다. 따라서 가치의 기준이 서양의 기준이다. 패션 모델도 서양미인이다. 서양의 중심은 로마에서 시작됐다. 우리가 그동안 많이도 서양화됐지만, 서양의 미를 모방할 수는 있어도 가치를 창출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과 투자가 따라야 할 것이다.
밀라노와 밀라노프로젝트의 차이
밀라노에는 5개의 패션 거리가 있다. 세계적인 명품 회사 발렌티노, 구치, 베르사체, 아르마니, 돌체 가바나, 프라다 본사가 밀라노에 있다. 밀라노 출신 디자이너 명품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개인재산이 98억불이고 세계적인 남성복 디자이너이다. 백화점 양복 전시장에서 일하다 창업했다. 정식으로 디자인 공부를 해 본 경력이 없다. 그러나 세계최고의 다자이너가 되었다. 지아니 베르사체의 어머니는 봉제업에 종사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봉제를 배웠다. 따로 디자이너 공부를 한 일이 없다. 그러나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었다. 문화적 토양이 그들을 키웠다. 이것이 밀라노와 밀라노프로젝트의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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