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수 학생들이 진로 나침반을 ‘SKY대 합격’에 맞춰 놓고 낙타가 바늘 구멍 뚫기보다 어렵다는 상위 1등급 안에 들기 위해 초중고 내내 기를 쓰고 책과 씨름한다. 모두가 전력질주하는 대입 레이스에서 ‘스톱’을 외친 뒤 뚜벅뚜벅 ‘자기 길’을 내고 있는 고3 남학생이 있다. 바텐더를 꿈꾸는 서민기군이 주인공이다.
“멕시코의 아름다운 일출을 표현한 데킬라 선라이즈는 층층이 나타나는 오묘한 주홍빛이 압권이에요. 잔 위에 소금을 살포지 얹은 마가리타, 잘게 부슨 얼음과 열대 과일이 조화를 이루는 마이타이도 근사하죠.”
서군의 입에서는 영어 단어, 수학 공식 대신 칵테일 레시피가 줄줄 나온다. 주문 받은 메뉴를 ‘맛있게 멋있게 재빠르게’ 선보이기 위한 손기술도 차근차근 익히는 중이다.
그의 목표는 바텐더. 20대에 자신의 바를 창업할 계획을 일찌감치 세워뒀다. 또래들이 수능 참고서와 씨름할 때 그는 조주기능사 자격증 문제집을 집어 들었다.
화상 병원에 누워 발견한 ‘칵테일’
‘자기 길’을 만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고2 가을 무렵 찾아왔다. 고교 입학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쓰러지곤 했던 그는 집에서 혼자 샤워 중에 기절했다. 뜨거운 물이 쉴 새 없이 몸으로 흘렀고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피부이식 수술까지 하고 한 달 넘게 병원신세를 지면서 지독한 가슴앓이를 했다.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까? 고민이 깊었죠. 자포자기 심정으로 게임 삼매경에 빠져 현실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그것도 단 며칠뿐이더군요. 병원 침대에 누워 꼼짝 달싹도 못한 채 온갖 궁리를 했죠.”
손재주가 좋은 그는 어릴 때부터 만들기에 능했다. 온갖 로봇들 뚝딱 조립한 후 컴퓨터에 연결해 작동까지 시킬만큼 실력이 빼어났다. 최첨단 무기에도 관심이 많아 각종 총, 미사일 종류며 특장점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막연히 공대 진학을 염두에 뒀다. 하지만 고교생이 되니 ‘과연 그 분야가 평생토록 할 수 있는 내 길 맞을까?’ 회의감이 몰려왔다.
“진로부터 정해야 겠다는 생각에 노트북으로 온갖 직업을 검색했는데 ‘칵테일’이란 단어에서 묘한 끌림이 오더군요.” 칵테일의 종류부터 바텐더 직업을 갖기 위한 과정, 처우, 롤모델이 될만한 바텐더까지 샅샅이 검색해 본 다음 마음을 굳혔다. 외아들에게 기대가 컸던 부모님은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했지만 결국 그의 손을 들어줬다.
수능 공부 대신 칵테일 레시피 암기
두툼한 칵테일 제조법을 담은 책부터 사다 메뉴 연습을 시작했다. 고2 겨울방학 때는 학원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바텐더의 길에 입문했다. 스카치, 위스키, 보드카, 럼, 진... 남대문시장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수십 종의 술과 재료를 사다가 차근차근 메뉴를 만들어 봤다.
“칵테일이 ‘섞는 술’에서 ‘섞는 음료’로 확대되면서 종류만도 5백 가지가 넘어요. 무알콜 칵테일도 꽤 많고 술잔의 종류도 각양각색이지요. 재료 배합에 따라 색도 맛도 도수도 달라지는 걸 보니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죠.”
지난 스승의 날에는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조리실습실에서 1일 바텐더가 돼 30여분의 선생님을 초대해 칵테일을 대접했다. “내 손으로 제조한 칵테일을 모든 분들이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뿌듯했어요. 선생님들께 격려도 많이 받았고요.” 축제 때는 동아리부스에서 블루와 레드 레몬에이드를 선보여 인기몰이를 했다.
내친 김에 국가자격증인 조주기능사에도 도전했다. 필기는 무난히 합격했지만 실기는 녹록치 않았다. 심사위원들 앞에서 7분간 3가지 칵테일을 레시피 대로 정확히 선보이기 위해 맹연습을 해야 했다. “지난 6월에 자격증을 땄을 때 뛸 듯이 기뻤어요. 자신감을 얻은 게 큰 수확이죠.”
20대 칵테일바 창업이 목표
얼마 전에는 서울현대전문학교 호텔바텐더학과에도 합격했다. “곧바로 취업해 현장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진로를 수정했어요. 대학에서 전문 교육을 받으며 인맥도 쌓고 인턴십 기회도 경험하는 게 장기적으로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최종 목표는 ‘서민기 스타일의 바’를 창업하는 거고요.”
예비 사장님을 꿈꾸는 서군은 ‘진짜 공부’할 게 산더미라고 엄살까지 떤다. “칵테일 원서를 보기 위해서는 영어공부가 시급하고 바텐더는 손님을 즐겁게 하는 직업이라 쇼맨십도 갖춰야 돼요. 그래서 틈틈이 마술을 배우는 중이에요. 고객 서비스, 공간 인테리어도 배워야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전통 제조 방식 그대로 포도를 발로 밟아 와인을 담갔는데 주위 반응이 좋았어요.”라며 자랑까지 덧붙인다.
1년 전 화상 때문에 병원에서 시름의 나날을 보냈던 그는 1년 후 180도 달라진 서민기가 됐다. “예전에는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목표가 불분명한 공부’를 했다면 지금은 나 스스로 찾아가는 공부를 하고 있어요. 힘이 들고 시행착오도 겪지만 방향이 명확하니까 속도가 붙네요.” 또래와는 조금 다르게 고3 생활을 하는 서군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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