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쿠데타는 다르다. 혁명은 민중의 참여로 권력의 근간 자체를 바꾼다는 점에서 일부집단의 무력에 의한 이루어지는 정변인 쿠데타와 구별된다. 제프 구드윈 교수는 “혁명은 기존의 국가나 정권에 반하는 불복종, 불법, 폭력 등의 방법을 통원한 대중적인 사회운동을 통하여 국가나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는 것으로 단순한 정권교체에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 방면의 변화를 이룩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적인 혁명은 프랑스 혁명 1789년, 러시아 혁명 1917년, 중국혁명 1949, 이란혁명 1979년이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나라도 쿠데타는 있지만, 혁명을 경험한 나라는 많지 않다. 일본은 잘사는 나라이지만, 혁명은 없었다. 한국은 쿠데타도 있었고, 혁명도 있었다.
이란의 근대화는 레자 샤 팔라비 황제부터이다. 그는 1921년 쿠데타를 하여 카자르 왕조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1925년 팔레비왕조의 황제가 되었다. 이란이 러시아 영국의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은 근대화 산업화가 서구의 국가들에 뒤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란횡단 철도의 건설, 도로의 건설, 학교와 병원의 설립, 여권의 신장을 추진하였다. 이차대전 중 독일을 도와 영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물러났다.
후계자는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1941년 승계하였다. 모하마드 팔라비는 같이 서구화와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전통적인 이슬람의 법률대신에 서구의 문화와 법률을 적용하도록 했다. 여자들에게 차돌을 금지시키고, 여학교, 영화관, 술집, 무슬림 달력을 폐지하고, 페르시아왕조의 달력을 허용하였다.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에게는 환영을 받았다.
이슬람 종교지도자의 불만은 높아갔다. 이슬람의 전통을 무시하고 서양의 문화를 직수입하는 반감도 컸다. 1970년대의 석유파동으로 산유국인 이란은 엄청난 외화가 이란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천문학적인 달러가 황제의 가족과 일가친척의 손에서 탕진되고 있었다. 그 부는 황실일가에 집중하고, 일부 도시 산업에 집중하였다. 1976년 이란의 석유수익은 10억 달러였다. 팔라비의 왕자 공주 63명이 가진 재산이 200억 달러였고 왕의 가족이 운영하는 재산이 30억 달러에 달했다. 석유의 수입으로 인프레가 일어나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오르고,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으로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다수의 농민에게는 천 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가난한 농촌의 생활이었다.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가 늘어났다. 성직자와 지식인은 팔레비 실정에 대한 감정이 높아갔고, 갑작스러운 서구화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높았다. 황제는 비밀경찰, 샤박SAVAK을 창설하고 서구화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자, 종교지도자, 민족주의자들을 투옥 고문하고, 처형하였다.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이슬람교의 성직자 이맘이다. 그도 팔레비 왕정을 비난했다. 반 팔라비 활동으로 8개월간 복역을 하였고, 프랑스에 망명을 했다. 망명 중 호메이니는 이란에서는 최고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회교율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 팔라비 운동은 회교사원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통시장 바자르를 통하여 전파되었다. 대도시 중심으로 일어났다.
시위대는 서구화의 상징인 극장과 레스토랑을 파괴하고 방화하였다. 시위 때 마다 경찰과 충돌하여 사상자가 나왔다. 팔레비왕은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석유 때문이었다. 카터 대통령 때이다. 카터는 인권을 대표하는 대통령이었지만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팔레비 정권을 지지해야 하고, 이란의 인권을 위하여서는 팔레비 정권을 묵과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미국은 겉으로는 인권, 안으로는 CIA를 동원하여 정권유지를 도왔다.
데모는 전국의 도시로 확산되고 과격화 되었다. 모든 신문과 방송은 통제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바자르를 통하여 유언비어가 되어 과장되게 유포되었다. 민심은 흉흉해졌다. 1978년 11월에는 전국의 노동자가 파업하고, 소방관이 파업하고 경찰이 파업하여 도시가 마비되었다.
1979년 1월 팔레비는 이집트로 망명 하였다. 호메이니는 파리에서 귀국하고, 이란의 혁명은 성공을 하게 되었다. 호메이니는 실세 권력자 등장하였다. 왕조는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서구화정책을 배격하고 신정정치를 취했다. 영화관, 술집, 레스토랑, 여학교를 철폐하고 이란의 모든 여성은 차돌을 차용해야 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외국인까지 강요했다. 종교경찰을 부활 시켰다. 이란의 혁명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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