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자양동에 작은 동네 빵집이 오픈하자 건강빵이라는 입소문과 함께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고 몇 달 뒤 매장을 넓혀야만 했다. 문턱 높은 백화점에도 입성하며 승승장구중이다. 장은철 오너 셰프가 개업 1년 만에 이룬 ‘라몽떼’의 눈부신 성장기다. 앳된 미소년 스타일의 장 셰프는 철없던 10대 시절, 입시와 씨름하던 또래들과 달리 ‘눈물 젖은 빵’을 만들며 뚝심 있게 달려온 14년의 세월을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넘을 수 없는 산과 씨름하고 싶지 않았어요.” 고교생 장은철에게 공부는 거대한 산이었다. 대학 대신 직업교육을 받기로 마음 먹고 아현산업정보학교 문을 두드렸다.
공부 열등생에서 빵 우등생으로
하루 종일 빵반죽을 주무르며 ‘재미’를 느꼈고 자청해서 이론책을 펴보기 시작했다. 공부 열등생에서 빵 우등생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그를 제과제빵반 담임이 유심히 지켜봤다. 그의 인생 첫 번째 귀인이다.
“졸업 후 곧장 취업하려는 내게 프랑스 유학을 권유하셨죠.” 대학의 꿈을 일찌감치 접었던 그는 솔깃했다. 담임은 빵 유학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서너 차례 학교로 불러 끈질기게 설득했다. “고만고만한 실력의 빵 기술자로 살게 하지 말고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란 큰 물에서 제대로 배울 기회를 주자고 하셨죠. 한때 유학을 꿈꿨다 좌절한 선생님의 회한까지 보태 간곡히 설득하자 부모님의 마음이 돌아섰어요.”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어렵게 떠난 유학이었기에 프랑스 국립제빵제과학교(INBP) 학생이 된 19살 장은철은 독하게 마음먹고 신나게 공부했다. 매일 새벽 4시 기상, 아침 6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에 제일 먼저 도착해 기를 쓰고 기술을 익혔다.
“내심 한국에서 빵의 기본기를 다지고 왔다고 자부했는데 수업 방식이 딴판이었어요. 자격증 취득 중심의 우리나라와 달리 빵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더군요. 좋은 재료, 최고의 기술로 빵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뼛속까지 스미도록 가르침을 받았어요.”
빵 공부에 미친 그를 지도교수가 눈여겨봤고 현장실습 시즌이 되자 조용히 그를 불러 프랑스 명장이 운영하는 베이커리를 소개했다. 그의 인생 두 번째 귀인과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혹독하게 빵 기술 익힌 프랑스 유학시절
알프스 근처 명장의 빵공방은 늘 전쟁터였다. 첫날부터 새벽 1시에 출근해 하루 18시간 꼬박 빵을 만들었다. 정해진 식사시간도 따로 없고 실습생이 된 이후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명장 셰프의 프라이드가 대단했어요. 만든 빵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바닥에 내동댕이치기 일쑤였죠. 작은 실수에도 엄청 혼 났어요. 연이은 과로 탓에 코피를 뚝뚝 흘리는 내게 급속 냉동실에 들어가 지혈하고 나와서 일하라고 할 만큼 냉정했지요.” 혹독한 수련을 견디다 못해 며칠 일하다 도망가는 실습생도 여럿 있었다.
“조리복에 내 손으로 단 태극마크를 보고 견뎠어요. ‘난 한국인 대표’라며 스스로를 추켜세웠고 유학경비 어렵게 보내주고 계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참고 또 참았어요.”
다혈질 명장도 늘 “예스, 셰프”라며 군소리 없이 일하는 그를 신뢰했고 얼마 뒤 제과파트 책임자로 앉혔다. 하루하루 밀려드는 주문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서 온갖 빵과 케이크, 수제 아이스크림까지 몽땅 만들며 고급 기술을 빠르게 습득했다. 기술 완성도,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한 덕분에 실습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하자 그의 실력은 단연 톱이었다.
“프랑스에서 4년은 좋은 빵을 만드는 철학과 기술을 다지는 시간이었어요. 귀국하면서 ‘메이드 바이 장은철표 좋은 빵’을 만들고 내 이름 석 자를 대한민국 베이커리업계에 꼭 남기겠다고 다짐했어요.”
‘좋은 빵 vs 돈 되는 빵’ 셰프의 선택은?
귀국 후 월급 70만원의 빵기술자로 바닥 생활부터 시작해 국내 유수의 베이커리 기업과 메종기욤, 퍼블리크 등 이름난 프랑스 정통 베이커리를 두루 거쳤다.
“좋은 빵과 돈 되는 빵 사이에서 늘 갈등의 연속이었죠. 버터 대신 원가를 낮추려고 값싼 마아가린, 첨가제를 쓰면서 정직한 빵을 만든다고 화려하게 마케팅하는 현실이 싫었습니다. 그런 불만이 내 가게를 빨리 오픈하게 만든 동인이 됐습니다.”
20여종의 빵과 디저트를 선보이는 라몽떼는 밤 10시부터 아침까지 꼬박 10시간 밤 새워 빵을 만든다. 20명 직원 모두를 ‘빵쟁이’로 만들고 싶은 게 그의 욕심. ‘빵은 절대 혼자가 아니라 팀으로 만든다’는 프랑스 명장의 가르침을 새기며 직원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기술과 철학을 나눈다.
서른 둘 젊은 셰프의 꿈은 뭘까? “3대째 가업을 잇는 프랑스의 푸알린은 그날 구은 빵을 비행기에 실어 전 세계에 공수할 만큼 유명한 빵집입니다. 바케트, 통밀빵처럼 흔한 빵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맛을 고수하죠. 라몽떼를 한국의 푸알린처럼 키우고 싶습니다.” 라몽떼의 미래를 그리는 그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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