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인연>은 인연의 끈이 닿을 듯 말 듯하다 놓쳐버린 이성을 마음에 품고 사는 많은 이들의 아련한 마음을 글로 되살린 국민 수필이다.
피천득 선생의 문향(聞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 우리 동네 의외의 장소에 숨어있다. 젊은이들의 공간 잠실 롯데월드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금아피천득기념관은 문학도를 꿈 꾸거나 꿈 꾸었던 이들이 잠시 들러 숨고르기 하며 기를 재충전하는 도심 속 아날로그 공간이다.
기념관에는 97세로 돌아가신 피천득 선생의 반포동 32평 아파트 일부를 고스란히 재현해 놓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은 호기심을 보이는 공간은 수필가이자 시인, 1세대 영문학자의 지식 창고이자 창작 공간인 서재. 의외로 작고 단출했다.
90대 ‘소년 작가’의 무소유 삶
늘 제자, 지인들에게 책을 나눠준 탓에 정작 그가 간직한 책은 별로 없다. 읽고 또 읽으며 아꼈던 책 200여권과 가족, 손주들 사진 액자가 아담한 책장에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세월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책상, 구형 선풍기 같은 선생이 생전에 썼던 일상용품을 찬찬히 둘러보며 무소유를 실천했던 선생의 ‘욕심 없는 삶’을 엿볼 수 있다.
특히 2남1녀 가운데 끔찍이 아끼던 딸 서영이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딸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을 늘 곁에 두고 애지중지 아껴 유명세를 탄 ‘난영이’ 인형이 눈길을 끈다.
아담한 철제 침대 곁을 지키고 있는 곰인형들도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선물로 받은 인형들이 늘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이 마음에 쓰여 노작가가 밤마다 눈가리개를 씌워 편안하게 재웠다는 일화 속 주인공을 보며 아이 같이 순수했던 ‘서정’ 작가의 속내를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90평생 격동의 근현대사를 산 선생의 일대기는 대하 역사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10대 때는 춘원 이광수 선생 댁에서 살며 영어를 배웠고 20대에는 상해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사연부터 주요섭의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금아 선생의 어머니를 모델로 해 썼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역사 속 인물들과 선생의 ‘깨알 인연’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피천득 작가가 롯데월드에 둥지 튼 ‘인연’
문학이 변방으로 밀려난 시대에 도심 한복판 노른자위 땅에 작가의 생애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탄생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했다.
2008년 금아피천득기념관 오픈 당시부터 인연을 맺어 6년째 거르지 않고 기념관 자원봉사를 자청하며 문인의 의리를 지키고 있는 수필가 최원현 작가가 당시의 에피소드를 소상히 들려준다.
“서울 한복판에 작가의 기념관이 들어선 건 대단히 드문 일이죠. 원래 이곳은 이순신기념관 자리였는데 전시물이 낡아 문을 닫은 뒤 롯데도 어떻게 활용할 지 고민하던 때였어요. 그러다 피천득 선생의 둘째아들인 당시 아산병원 소아과의사였던 수영씨가 롯데와 우연히 연이 닿아 기념관 건립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금아 선생이 돌아가신 뒤 1년만의 일입니다.”
침실과 서재의 세간살이와 훈장, 육필 원고, 옷가지까지 고스란히 옮겨왔다. 꽃무늬 핑크 벽지와 선생의 서재 창 밖 풍경까지 그대로 사진 찍어와 재현해 놓았다. 기념관 오픈 소식을 반가워한 금아 선생의 팬은 자비로 제작한 선생의 동상까지 기증하며 힘을 보탰다고 한다.
“아기처럼 순수한 분이셨어요. 각종 문인 협회나 단체에 이름 올리지 않고 조용히 사신 선비 같은 분이죠. 그런 내공이 쌓여 <인연>, <수필> 같은 명문장이 탄생했겠죠.” 최 작가가 생전의 금아 선생을 회고하며 구수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기념관에는 롯데월드로 단체 견학 온 유치원생, 가족 나들이객부터 젊은 시절 ‘문학앓이’를 했던 머리 희끗한 노년층까지 다양한 관람객이 찾아오지만 번잡스럽지 않아 조용히 사색하며 쉬었다 가기 안성맞춤이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가끔씩 시낭송회 등의 문학 행사도 열린다.
금아피천득기념관
위치 : 잠실 롯데월드 3층 민속박물관 옆
운영시간 : 오전 10시~ 오후 7시, 연중무휴, 무료 관람
문의 : 02-411-4762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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