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나’와 ‘내 가족’ 밖에 모르던 도시인들 가운데 ‘우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고 서울에도 성미산, 삼각산 같은 ‘마을’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안마을’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뭉친 강동구 성내동 사람들도 열심히 ‘이웃사촌’ 엮어가는 중이다.
북카페로 시작된 마을공동체 씨앗
마을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곳은 성내2동주민센터 바로 옆 자그마한 북카페 ‘보아스’. 2012년 2월 무렵이다. 북카페의 주인장 김영현 목사는 어린이, 청소년, 성인들이 읽을 만한 책을 골고루 갖춰놓고 토스트까지 무료 제공하며 동네 사람들의 정거장을 만들었다. “삶이 팍팍한 서민동네란 첫인상이 강했어요. 길거리에서는 폐지 줍는 어르신들과 종종 마주쳤고 아이들 학원비 한 푼이라도 벌려고 아르바이트 나가는 주부들도 많았죠.” 김 목사는 2년 전을 회고한다.
주택과 다세대들이 밀집돼 있는 성내2동은 독거노인을 비롯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이 많이 살고 기반 시설이 낡아 강동구 18개 동 가운데서도 낙후된 지역으로 꼽혔던 곳이다.
북카페를 기반으로 책읽어주는 엄마 모임이 만들어졌고 점점 어린이, 청소년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동네 사람들끼리 ‘관계’가 만들어졌다. 때마침 강동구가 마련한 마을리더 아카데미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사람들이 뭉쳐 마을 사업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성내동 30년 토박이 김광묵(76세)씨가 마을의 웃어른으로 회장을 맡았고 정겨운 옛이름도 되살렸다.
“우리 동네는 옛날부터 풍납토성 안쪽에 있다고 해서 성안마을로 불렸어요. 30년 전에는 30여 가구만 옹기종기 모여 살뿐 이 일대가 다 논과 밭이었죠.” 김 회장은 성내동 옛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준다.
강풀만화거리가 물꼬 터준 ‘마을의 재발견’
성안마을이 외지인들 사이에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된 지난해 9월 무렵. 낡은 주택 담벼락마다 강동구 출신 만화가 강풀의 인기작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주요 장면들이 화사한 벽화로 탄생했다.
“벽화를 보러 멀리서 연인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어가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벽화가 담고 있는 재미난 메시지를 들으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니세요.” 강풍만화거리 도슨트 김대성씨가 신이 나서 설명한다. 김씨는 페이스북에 만화거리 현장 사진을 틈나는 대로 올리며 마을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10월 말에는 벽화거리 앞에서 축제를 열어 ‘마을 공동체’의 잠재력과 동네 사람들끼리 끈끈한 유대감을 확인하기도 했다. “사설 주차장 주인장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하루 영업을 접고 주차장을 축제 공간으로 내줬고 늘 자기들끼리 모여 기타, 드럼 치던 동네 아이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무대에 서서 연주 실력을 뽐내며 10대의 존재감을 보여줬어요. 십시일반으로 힘을 합친 마을잔치의 장면 장면이 가슴이 울컥할 만큼 감동적이었죠.” 마을 사업에 팔 걷어 부치고 나선 윤영희씨가 감회를 밝힌다.
주민들 손으로 처음 마련한 동네 축제는 노인과 아이들 간 세대 공감의 폭을 넓혀줬다. “동네 공원에서 아이들에게 솜사탕을 만들어주자 ‘할아버지 저도 주세요, 또 주세요’ 수십 명씩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며 재잘거리는 그 모습이 참 예뻤죠. ‘동네 아이들이 다 내 손주 같구나’란 진한 감동을 처음 맛보았어요.” 김 회장이 뿌듯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마을이 만들어준 ‘이웃사촌’
이웃끼리 어울리는 재미를 맛본 뒤부터 동네 사람들은 인문학강좌, 영화상영, 이웃돕기 일일찻집, 가족에게 손편지 쓰기 같은 마을 대소사를 서로 힘을 보태 차근차근 진행하는 중이다.
마을 북카페에서 만난 주민 김은주씨는 “아이들 키우다 보면 또래 엄마들끼리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절감했는데 자꾸 동네 행사에서 만나다 보니 관심사, 연령대가 엇비슷한 품앗이 모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며 만족감을 나타낸다.
최근에는 ‘성안마을 이웃사촌’ 제호의 마을신문까지 창간하며 결속을 다지는 중이다. “책수레를 동네 곳곳에 끌고 다니며 아이들과 책을 함께 읽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10대를 따뜻하게 품어줄 신나는 청소년 프로그램을 준비 중입니다. 상권이 쇠락한 성내전통시장을 활성화시킬 아이디어도 짜내고 있습니다. 이웃끼리 모여 새로운 가능성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과 경험들이 소중하고 또 행복합니다.” 상기된 표정의 김 목사 입에서는 올해의 계획들이 술술 흘러나온다.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고 어른들이 즐겁게 일터에 나가며 노인들이 보살핌을 받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성안마을사람들은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며 힘을 합치는 법을 차근차근 배워나가고 있었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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