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사춘기 남학생들이라면 열광하는 축구, 농구, 야구 같은 스포츠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김해찬군. 대신 도롱뇽, 전갈, 잉꼬, 모란 앵무새인 고사쿠라 등 온갖 종류의 애완동물에 열광하며 골고루 키웠다.
‘구피 사육’ 황무지에 도전장 낸 마니아
“살아 움직이며 먹고 자고 번식하는 모습, 또 사람과 교감하는 방식이 동물별로 제각각인 게 신기했어요.” 틈날 때마다 청계천 애완동물거리를 쏘다녔고 이 분야에 관한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하지만 동물을 질색하는 부모님과 늘 실랑이를 벌였던 그는 초등4학년 무렵 사육이 ‘얌전한’ 관상어를 키우기로 어렵게 합의를 봤다. “열대어의 보석인 구피에 매료됐어요.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등 모양과 색깔이 예쁘고 키우는 사람에 따라 색다른 구피를 만들 수 있다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죠.”
열대어는 예민하기 때문에 세심하게 관리해 줘야 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간다. 정기적으로 수조의 물을 갈고 먹이를 주며 수온, 수질, pH농도를 꼼꼼히 체크하며 김군은 구피 숫자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책이나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만 믿고 그대로 따라했는데 되려 죽어버리는 거예요. 멋모르고 같은 수조에 구피를 합사했다 실패하고. 우리나라의 관상어 시장은 계속 크고 있지만 정확한 사육 정보는 없더군요. 말 그대로 황무지였죠. 취미에 그치지 말고 제대로 파보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구피 브리더(전문적으로 키우는 사람)는 지느러미, 꼬리의 모양, 몸 색깔을 자유재로 변형시킬 수 있는 교배 레시피를 따로 갖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 마리에 5만원이 넘을 만큼 값이 비싸고 사육과 번식 노하우가 ‘돈’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알짜정보를 얻기는 만만치 않다.
어항 스무 개에 열대어 키우며 연구
“구피를 취미를 넘어 연구용으로 키우게 되면서부터 갖가지 실험을 설계하고 그 결과를 꼼꼼히 정리하기 시작했죠. 사실 국내 브리더들은 주먹구구식 정보만 있을 뿐 수치화된 사육 데이터는 거의 없거든요. 내가 한번 제대로 정리해 보자 마음 먹었죠.”
한번 꽂히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김군은 집에 20여개가 넘는 어항을 놓고 구피 연구에 매달렸다. 고1 때 학급 임원선거에서는 ‘건조한 교실에 어항을 설치하겠다’는 이색 공약을 내걸어 당선돼 실제로 거친 남학생들이 생활하는 교실에서 물고기를 키우기도 했다. 그의 ‘오타쿠 기질’을 눈여겨 본 정호근교사의 눈에 띄어 김군은 발명영재반에 들어가게 됐고 그 뒤 구피 연구에 가속도가 붙었다. 혼자서 끙끙대며 실험하고 정리했던 구피 데이터를 지도교사 도움을 받아가며 학술 논문의 틀에 맞춰 체계화할 수 있었다.
“내심 이 분야 마니아라고 자부했는데 막상 연구 테마를 정해 서론, 본론, 결론의 논문 포맷에 내 연구 관점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는 일이 녹록치 않았어요. 힘들기는 했어도 ‘머릿속 정보를 글로 정리해야만 진짜 내 지식이 된다는 것’을 배웠죠.” 특히 논문을 쓰면서 국내 구피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생생한 노하우를 배우고 기존에 나와 있는 연구논문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구피의 환경변화 따른 적응력 연구’는 고1 때 서울학생탐구발표대회에서 동물 부문 1등을 수상했다. 하지만 전국대회 출전 티켓이 걸려있는 서울시과학전람회에서는 아쉽게 우수상에 그치고 말았다.
“전국대회를 목표로 공들여 준비했기에 충격이 컸어요. 하지만 늘 엄한 발명영재반 정호근 선생님이 ‘괜찮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며 다독거려준 한마디에서 위로 받았고 슬럼프에서벗어났죠. 올해는 몇 배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가 성장’을 많이 했다고 속내도 털어놓는다. “심사위원들 대면심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망쳤어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교내 토론대회에서는 늘 1~2등상을 휩쓸 만큼 말솜씨는 자신 있었는데 막상 심사위원들 앞에서는 긴장한 탓에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못했죠. 내 한계를 알게 됐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분발할겁니다.”
세상 유일 ‘김해찬만의 무엇’ 만들고 싶어
김군은 구피 애완시장의 ‘개척자’로 자부심이 크다. “구피 브리더를 넘어선 탐구자로서 수조 속 여러 변인을 통제하며 구피 사육에 적합한 조건들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만들었어요. 시교육청 사이트에서 내 논문을 발견한 누군가가 온라인카페에 퍼 나르는 걸 보며 내심 뿌듯하죠. 입시가 끝나면 구피 사육법을 매뉴얼로 만들 생각입니다.”
학교에서는 올해 관상어를 연구할 수 있는 실험실까지 만들어져 김군은 한껏 신이 났다. 집에 있는 어항을 실험실에 옮겨 놓고 매일 관찰하고 있다.
“고교 생활이 즐거워요. 공부 압박감에 짓눌리지 않는 건 열대어란 나만의 분출구 덕분이죠. 봉준호 영화감독이 ‘남이 해보지 않는 세상 유일의 것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말에 백배 공감해요. 나도 ‘김해찬만의 무엇’을 꼭 만들 겁니다.” 대학에서 생명공학이나, 수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그에게는 ‘끝장을 볼만큼 미쳐본 마니아’ 특유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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