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선배님께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지내시죠?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정신적으로 힘듭니다. 시작부터 푸념을 늘어놔서 죄송합니다. 학원가에 나온 지도 만 15년이 흘렀네요. 그동안 제 모습도 많이 변해서 이제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걱정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제가 힘든 건 다름이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확신하고 있는 교육의 방향과 학부모님들이 원하는 방향 사이의 충돌을 발견하는 것이죠.
동조현상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동조(同調)’라고 한답니다. OX 퀴즈에서 답을 잘 모를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쪽을 따르는 것도 일종의 동조죠.
심리학에서는 동조가 일어나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은 자기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 적어도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집단이 그 구성원들을 이끌어 나가는 질서나 규범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러한 집단의 압력 때문에 동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만약 어떤 개인이 그 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집단에서 배척당하기 쉽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사람들은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동조를 하게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신이 믿지 않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동조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도 이런 동조 현상이 존재합니다. EBS 교재는 대학으로 가는 부적을 넘어 이미 성경이 된 지 오랩니다. 고3 3월 모의고사 성적이 수능 성적이다, 내신이 좋지 않으면 절대 대학에 갈 수 없다는 미신. 논술은 로또다.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 명문대로 가는 필수 조건이 된 지도 오래됐죠. 아이들을 퍼센트로 토막내서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만들어놓고 넌 왜 남들처럼 1등급이 안 나오냐고 추궁합니다. 4%의 삶이 아니면 모두 실패자로 낙인찍은 우리 사회의 슬픈 초상입니다.
학부모를 설득하려 하지 말고 학부모의 요구에 맞추라?
어떤 원장님은 그러더군요. 학부모를 설득하려 하지 말고 학부모의 요구에 맞추라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동조할 수 없습니다. 첫째, 명색이 입시 전문가인 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아이를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학부모의 요구에 맞춘다는 것은 이익을 위하여 신념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니 아이들 앞에 떳떳하지 않고, 더 나아가 제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이들에게 늘 자립적인 공부를 강조합니다. 나아가 아이들의 삶이 자립적인 삶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입시의 성공은 합격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노력해서 이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데 있지 않겠습니까? 투르게네프를 인용해볼까요?
오오! 청춘이여! 청춘이여! 그대는 우주의 온갖 보물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대가 지니는 아름다움의 비밀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다. - 『첫사랑』
학부모님들은 이런 제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성적이나 올려주지 뭘 쓸데없는 걸 가르치려고 하세요? 그런데 과연 쓸데없는 교육일까요? 억지로 아이가 책을 펴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생각까지 억지로 하게 만들지는 못하잖습니까?
의식이 크지 않는 교육은 죽은 교육 아니겠습니까?
그릇이 크지 않은 데 무얼 담을 수 있겠습니까?
연세대를 가려면 연세대에 걸맞은 의식을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를 발견하는 교육
가르치는 사람도 가르치는 이유를 발견하는, 배우는 사람도 배우는 의미를 발견하는 그런 교육과 그런 만남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복의 비밀은 대학이나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율성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학원이 아이들의 자율성을 키우는 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율성이 충만하면 까짓것 SKY쯤이야 훨훨 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따끔한 회초리
옛 선비들은 학문을 수양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신독(愼獨)이란 개념을 매우 좋아합니다. 남이 보든 보지 않든 마음을 진실하게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세상은 점점 효율성을 중시하고 선생은 학생을 학생은 선생을 대체 가능한 타자(他者)로 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참다운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저는 가슴 속에 따끔한 회초리 하나 준비하렵니다. 그리고 약해질 때마다 종아리를 치렵니다. 그리고 아직도 너무나 순진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윤권호 국어논술 학원
원장 윤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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