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실하게 직장 다니던 30대 중반의 워킹우먼이 모든 일상을 ‘스톱’하고 남미로 떠났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해외봉사단원으로 변신한 그는 파라과이, 에콰도르에서 머무르며 IT 봉사를 펼쳤다. 6년의 세월이 흘러 귀국한 뒤에는 스페인어 전도사가 되어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 있다. 가슴에 품은 열정은 꼭 실천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열혈 여인을 만나 보았다.
매주 목요일 저녁. 회사에서 퇴근한 장미경(45세)은 지하철,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바람처럼 날아 광진정보도서관에 도착한다. 스페인어 강사로 변신한 그는 두 시간 내내 열강한다.
알차게 가르치는 스페인어
이곳의 스페인어 회화반은 알찬 무료 강의로 입소문이 났다. “3개월 기초반에서 회화, 문법을 공부하면 혼자 스페인어를 독학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게 내 목표에요. 예습, 복습은 필수고 매시간 단어시험, 분기별 종합시험까지 보며 강도 높게 진행해요.” 그의 강의 방침이다. 수업이 ‘쎈’ 만큼 착실하게 3개월 공부하면 기초 실력을 착실히 닦을 수 있다.
“1년 넘게 분기별로 강좌를 진행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재수강은 금하고 있지요. 수강생끼리 따로 동아리를 만들어 매주 공부하세요. 열혈 강사 밑에서 열혈 학생이 배출되네요.” 정종희 사서가 덧붙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는 인기가 높지만 스페인어는 찬밥 신세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유럽 뿐 아니라 남미권 대다수 나라에서는 스페인어가 모국어며 미국 남부에서도 많이 쓰이기 때문에 배워두면 여러 모로 쓸모가 많다. 때문에 해외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오고 있다.
강사 장미경은 재능기부로 무료로 강의하지만 공들여 수업 준비를 한다. 주말마다 강의 자료 만들고 시험지 채점이며 수강생 숙제도 오탈자까지 확인한다. 꼼꼼하게 준비해 깐깐하게 가르치는 그에게 수강생들은 무한 신뢰를 보낸다. 방학 중에는 중고생을 위한 특강도 따로 열고 있다.
남미 봉사가 준 선물 ‘행복한 삶’
대학에서 전산과 영어를 전공하고 평범하게 직장 생활했던 그가 어떻게 스페인어와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변화무쌍한 IT업계에서 일하다보니 훌쩍 30대 중반이 되더군요. 더 늦기 전에 오랜 꿈이었던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이 되기 위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어요. 원래는 2년만 봉사하고 돌아와 내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었어요.” 소심한 A형에 4남1녀의 막내딸로 곱게 자란 그는 2004년 인생의 첫 도전장을 내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남미 파라과이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시골 중고교 전산실로 발령받은 그는 학생과 교사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쳤다. 고장난 PC 수리부터 컴퓨터 관련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현지인들과 금방 친해졌다. “파라과이 사람들은 친화력이 좋고 참 순수해요. 낯선 동양인을 친구처럼 대해주며 식사 초대도 자주 받았어요.”
개도국이지만 전통문화에 자부심이 강한 파라과이 사람들을 보며 그는 많은 걸 배웠고 우리나라 문화를 속속들이 알려주고 싶었다. 추석 때는 자비까지 털어 한국 체험 행사를 열만큼 억척스럽게 활동했다. “송편 같은 우리 음식을 맛보게 하고 한복도 선보였죠. 때마침 한국에서 히트 쳤던 ‘집으로’ 영화를 강당에서 상영했는데 온통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어요. 한국의 정서가 남미에서도 통하는 걸 보니 신이 났죠.”
그 뒤 에콰도르로 건너가 3년 더 봉사활동을 했다. 임기를 마친 뒤에는 공부에 욕심이 생겨 현지 교육대학에서 1년간 스페인어문학을 전공했고 휴가 때마다 남미 전역, 스페인, 포르투칼을 여행하며 그네들의 삶 구석구석을 살폈다.
스페인어로 보여주고 싶은 ‘넓은 세상’
“우리 보다 가난하지만 자기 삶에 정열적인 남미사람들을 보며 ‘나는 지금 행복한가?’란 질문을 늘 스스로에게 던졌어요. 도서관 재능기부도 이 때문에 시작하게 됐죠.” 귀국 후 집근처 광진도서관을 다니던 그는 입시, 취업 준비에 찌들어 삭막하게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바쁜 직장생활을 쪼개 봉사를 결심했다.
“스페인어를 통해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수업 틈틈이 여행 경험, 현지 음식, 남미 문화를 다양하게 소개해요. 경쟁이 치열한 좁은 대한민국에서 복닥거리지 말고 세계를 보라는 의미죠.”
수강생들은 스페인어 전공자부터, 취업 준비생, 직장인, 유학생, 주부 등 각양각색이다. “노부부가 내 수업을 들은 뒤 방학 중 귀국한 유학생 아들에게 수강을 권유했어요. 미국에 살면서 스페인어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그 친구는 출국 직전까지 열심히 수업 들으며 내게 고맙다하더군요. 글로벌 감각을 가진 이런 젊은이를 다양하게 만날 수 있으니 참 뿌듯하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드는 데 자신의 작은 재능을 보태고 싶다는 장미경씨. “밤 10시쯤 수업을 마치면 탈진 상태가 되요. 하지만 귀갓길에 느끼는 그 희열감이 내 삶의 활력소입니다. 앞으로 힘닿는 대로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에게도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에게서 삶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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