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수원 여성’을 만나다-대안공간 눈 대표&조각가 이윤숙

“성(城)안 사람들의 삶도 무형의 문화유산이죠”

지역내일 2013-03-22 (수정 2013-03-22 오후 6:56:05)

스콧*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1999년 입시 미술학원을 접고, 여행 다니며, 개인 작업에 농사도 짓던 몇 년간의 시간은 이윤숙 대표가 책에서 보고 꿈꾸었던 정말 ‘조화로운 삶’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행궁동 마을, 한두 개 있던 갤러리도 IMF이후 문을 닫았고, 골목도 빛을 잃었다. 이 대표는 남편 김정집 관장과 함께 팔을 걷어붙였다. 행궁동의 명물 ‘대안공간 눈’은 2005년 4월, 그렇게 만들어졌다.   


죽은 골목에 생명의 싹을 틔우는 ‘대안공간 눈’
“골목과 사람의 가치를 끌어내는 데는 이런 공간만큼 좋은 게 없어요.” 늘 같은 마음이었던 남편이 갤러리를 먼저 제안했고, 살고 있던 집을 작가들과 함께 직접 개조했다. 왜 곧 보상받고 허물릴 곳에 투자를 하느냐, 차라리 집을 허물고 다시 지으라는 등 주변의 얘기도 많았다. 하지만, 시아버님이 손수 지으시고, 시어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손때 묻은 이 집의 모습을 최대한 간직하고 싶었다. 비용을 아끼며, 발품을 팔면서 꼬박 1년이 걸렸다. 나지막한 건물에 마당을 품고 있는 전시실과 창 넓은 카페, 그 사이에 초록이 싱그럽게 우거지고, 흰 눈도 소복이 쌓였다. ‘눈’ 내리는 갤러리 대안공간 ‘눈’, 묘한 공통분모가 느껴진다.
“제가 겨울의 ‘눈’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시각적 예술에서의 ‘눈’이라는 의미도 있어요. 제 작품 속엔 싹의 ‘눈’이 많이 등장하는데, 슬럼화된 행궁동에 생명의 싹을 틔우는 역할을 해보자는 마음도 담았죠.” 이윤숙 대표는 수원 토박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화성(華城)에 머물러 있다. 화서동에 살았지만, 신풍초와 북수동성당을 다니며, 주로 놀던 곳,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어떻게든 살고 싶어 했던 곳, 그 곳이 화성 안 행궁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1만4천여 명의 사람들만 남았다. 시에서 이곳을 민속촌으로 조성한다는 소문은 이 대표가 ‘대안공간 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다지게 했다.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사람들은 수원화성만 보지, 왜 그 안의 사람들은 볼 생각을 안 할까요. 화성의 역사와 함께 한 그들의 삶도 무형의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해요.” 사람, 자연, 생명이란 주제를 다루는 조각가 이윤숙, 그가 바라보는 사람은 갤러리 마당에 내리는 어스름한 저녁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행궁동레지던시, 행궁동사람들 프로젝트로 문화예술 들이기
대안공간 눈은 500명 가까운 작가들에게 전시공간을 무료로 제공해줬고, 마을 속에 문화를 들이기 위한 여러 시도도 진행했다. 작가, 주민, 수원의제21 등과 행궁길발전위원회로 활동하면서 행궁길의 빈 점포에서 빈집미술관 전시도 하고, 철거위기의 건물을 시의 허락을 받아 레지던시 공간으로 만들었다. 주민이 제안하고 운영하는 특별한 행궁동레지던시는 5기까지 이어지며, 한해 25~30명의 작가의 활동으로 행궁동에 문화예술을 피어오르게 만든 계기가 됐다. 2010년 ‘이웃과 공감하는 예술프로젝트-행궁동사람들’은 국내외 입주 작가들의 기획전시와 함께 주민과 필요한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소소하게는 문패 만들기부터 벽화그리기, 경로당 어르신들의 솜씨 발굴까지 다채로운 움직임들로 꾸며졌다.
“최혜정, 김보라 작가와 북수동경로당에서 진행했던 ‘유쾌한 의자씨’는 인상적인 프로그램이었어요. 어르신들이 공동으로 의자에 그림을 그리면서 얼마나 즐거워하시던지…, 직접 벽화의 도안을 하시고 벽을 색칠하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죠.” 하얀 머리 성성한 벽화 그리는 할머니의 붓에선 꽃다운 열여덟 소녀의 설렘과 순수함이 뿜어져 나왔다. 부정적이기만 하던 어르신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당신이 할 일을 묻고, 내년에도 재미있는 것 해달라며 먼저 다가왔다. 핏기 하나 없는 무채색의 얼굴에 고운 립스틱 하나 발랐을 뿐인데, 얼굴이 환해지고 홍조를 띤 듯한 기분, 스산했던 시멘트벽의 작은 변화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자연스레 불량 청소년의 발길도 뜸해지고, 사람이 떠나던 마을이 찾아오는 마을로 변하고 있다”는 이 대표에게서 행궁동을 향한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 


주말이면 문전성시, 누구에게나 잘 나가는 행궁동 
이윤숙 대표에겐 또 다른 직함이 따라붙는다. 마을기업 행궁솜씨 대표. 작가들의 일자리 창출과 콘텐츠 제공으로 마을의 문화자원을 만들고, 행궁동만의 특별한 손맛이 살아있는 관광상품으로 수익을 낸다. 준비된 행궁동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2011년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으로 선정됐고, 한국관광공사의 창조관광사업에서 우수상도 받았다. 한 달 고작 2~300명이었던 대안공간 눈의 관람객은 평균 2천여 명으로 늘었다. 주말이면 수많은 연인, 가족들이 행궁동벽화골목을 찾는다. 작가의 테마와 어르신들의 솜씨가 담긴 이야기 있는 벽화를 거쳐 대안공간눈 1,2전시실과 윈도우갤러리 작품전시, 행궁동레지던시, 수원천, 주민센터의 정월행궁나라갤러리 등 행궁동 주변의 문화공간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데이트하기 좋은 코스’가 완성된다. 플러스알파로 매주 토요일 오후3시, 마당에서 즐기는 재능기부프로그램 ‘들썩들썩 골목난장’까지 볼거리가 풍성하다. ‘행궁동 예술마을만들기’로 2011년 대한민국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이곳저곳에서의 벤치마킹 요구도 쇄도한다. 
작가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레지던시 입주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이곳에 머무르는가 하면, 많은 작가들이 멀리서도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다. 언제나 누구든지 환영하지만 단, 전제조건이 있다. 주민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는 것, 이 대표의 변치 않는 모토다.  


오늘도 행궁동에서 인생의 솜씨를 빚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품었던 수원과 행궁동의 발전. ‘행궁동사람들 프로젝트’ 3년여 만에 모든 게 달라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경기문화재단, 수원시의 지원, 호흡을 같이 해준 작가와 주민들, 시민단체, 이 모두가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행궁동은 남편의 고향이자, 제겐 놀이터였어요. 오랜 주민이고, 작가다 보니까 마을사람들의 거부반응도 없었고, 작가와 주민 간의 가교역할도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털털한 제 성격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요?(웃음)” 인간적인 소탈함은 처음 만난 리포터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을 때부터 직감했던 바다. 넉넉한 수입은 없지만, 마음이 허한 적은 없다. 수시로 요리를 만들어오는 24통 통장님을 비롯해 누군가는 쌀이 떨어지면 가져다주고, 김장도 해다 주는 등 끊임없이 채워준다.
“아들이 4년 전에 고열에 시달리며 루푸스 진단을 받았는데, 그때가 막 행궁동 프로젝트를 시작하느라 정신없을 때였어요. 그때 이게 뭐하는 짓인가 정말 후회가 되더라고요. 하지만 아이가 다행히 몸을 잘 추스르면서 얼마나 감사하던지….” 누구나 예측 못할 인생을 산다. 행궁동 사람들도 삶 속에 친근한 예술을 들여놓으며, 이렇게 살게 될 줄 알았을까. 그렇게 또 다른 무언가는 어김없이 이윤숙 대표의 행궁솜씨에서 빚어진다. 


오세중 리포터 sejoong7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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