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날인] 한영외고 김은지

발로 뛴 유적지 답사 3년, 역사와 통하다

지역내일 2013-02-20

 “수능, 논술시험 봐서 대학 입학하는 고3 수험생이나 과거급제하려면 유교경전 달달 외우고 작문시험 통과해야 하는 조선시대 유생들이나 시대는 달라도 시험 유형은 똑같아요(웃음).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말에 백퍼센트 공감해요.” 김은지양이 야무지게 답한다.


‘답사, 기록하지 않으면 남는 게 없더라’
 ‘청소년의 눈으로 보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청소년의 눈으로 보는 서울의 항일독립운동유적’, ‘우리들의 문화재 사랑’ 4권의 두툼한 자료집을 내민다. 지난 3년간 김양이 위례역사문화연구회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며 또래들과 함께 펴낸 책자다. 정기적으로 답사 다니며 꼼꼼히 기록한 자료로 손품, 발품 팔며 공들여 만든 흔적이 페이지마다 묻어있다. 한 권 한 권 설명해 주는 김양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묻어난다.
 그가 위례역사문화연구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3 무렵. 동사무소에서 서류 정리, 쓰레기 줍기 같은 천편일률적인 봉사 말고 ‘가슴 뛰는 활동’을 찾아보라는 언니의 충고를 귀담아 들었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역사를 테마로 정한 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송파구에 터전을 두고 오랫동안 활동한 위례역사문화연구회를 발견했다. 자기소개서 써내고 면접까지 통과한 후에야 동아리에 합류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궁궐 모니터링부터 시작했어요. 현장에 나가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은 뒤 내 관점에서 느낌 점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고서를 썼어요. 횟수가 쌓이면서 우리 문화재의 새로운 면들이 보이더군요. 가령 경복궁을 답사한 뒤 창덕궁을 보니 자연 속에 폭 파묻힌 독특한 입지 특성이 눈에 들어왔어요. 한편으로는 거미줄 투성이에 먼지 뽀얗게 뒤집어 쓴 창덕궁 인정전을 보니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우리문화재 청소 봉사를 다녔다.
 이처럼 책으로만 훑었던 역사를 발품, 손품 팔아가며 오감으로 배우니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신채호 선생을 비롯해 조선시대 말 당대 지식인들이 조직적으로 항일 운동을 펼쳤던 ‘신간회’는 근현대사 수업시간에 비중 있게 다루고 시험 출제도 많이 되요. 그런데 막상 신간회 본부터를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도로 한 구석, 쓰레기 더미 속에 표지석만 우두커니 서 있더군요. 나운규의 아리랑을 상영했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극장 단성사도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과거, 현재가 단절된 모습이 안타까웠던 그는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를 기록으로 남기는데 열정을 쏟아 부었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남는 게 없더군요.” 3년간의 동아리 활동을 하며 배운 깨달음이다. 지난 1년간은 동아리 지도교사 역할까지 떠맡았다. 중1부터 고1까지 20명의 학생을 이끌고 매월 두 차례 서울시내 역사 유적지를 찾았다. 이상재, 손병희, 여운형 선생의 집터, 조선어학회관터, 심우장, 서대문형무소 등 항일유적지를 샅샅이 훑었다.


 답사 다니며 리더십, 사교성 키우다 
 “역사의 숨은 속살을 많이 봤어요. 서대문형무소의 잔혹한 고문기구들, 친일인명사전을 꼼꼼히 살피며 다들 울컥했어요. ‘학교에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적나라하게 가르쳐야 한다’며 우리끼리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지요.”
 발로 뛰며 쌓은 내공 덕분에 김양은 대다수 학생들이 꺼리는 근현대사 시간에 ‘소름이 돋을 만큼 짜릿한 재미’를 느낀다고 말한다. 동아리 활동을 하며 생생한 우리 역사 공부 뿐만 아니라 리더십, 사교성, 책임감, 스피치 실력 등 삶의 필수 덕목도 덤으로 배울 수 있었다.“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홍세화 선생 강연을 들으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지요. 동아리 팀워크를 위해서는 ‘이거 해라’ 식의 강요가 아니라 설득과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는 걸 실전에서 체득했습니다. 일찌감치 세상 공부를 한 셈이죠.”
 무엇보다 그는 3년간의 열성적인 활동 덕분에 ‘숨은 적성과 재주’를 빨리 찾았다. “역사 공부가 내 적성에 딱 맞는다는 것, 지도교사 역할을 하면서 남을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래서 장래 진로도 역사교육 쪽으로 정했습니다.”


역사는 ‘내 운명’ 
 김양의 폭넓은 경험은 학교 생활의 윤활유가 되고 있다. 경제경영동아리, 인권동아리 활동을 꾸준히 했고 교내 토론대회에 출전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아주대에서 주최한 프랑스어 말하기 대회도 친구들끼리 팀을 꾸려 한 달간 공들여 준비한 덕분에 동상을 타기도 했다.
 “본래 낙천적이고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성격인데다 위례역사문화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팀원들끼리 효율적인 역할분담과 조율하는 능력이 길러졌어요. 덕분에 팀 작업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지요.”    
 오지랖 넓게 교내외 활동을 하면서도 성적은 꼼꼼히 챙기고 있다. 매일매일 ‘깨알’ 같이 스케줄표를 짜서 꼭 지키려고 애썼고 고3이 되면서 공부의 고삐를 더 단단히 죄고 있다. “성적은 딱 공부한 그만큼 나와요. 자투리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중입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가 좌우명이거든요.” 일찌감치 장래 진로를 ‘역사’로 못 박은 그는 다부지게 답한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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