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몸이나 마음의 치유를 의미하는 힐링(healing)이 화두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상처 치유와 극복을 위한 힐링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현상.
‘스트레스’하면 주부들도 할 말이 많다. 남편, 아이들, 시댁, 친정...... 나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 천지다. 이런 주부들에게 ‘나만의 힐링법’에 대해 물었다.
하염없이 걷다보면 마음이 좀 편안해져요-백영은(46·대치동)
고3 딸과 고2 아들을 둔 백영은씨는 올 한해를 정말 정신없이 보냈다. 아직 수시2차와 정시가 남아있어 여전히 마음이 불안한 상태. 철석같이 믿고 있는 딸아이가 공부로 힘들어할 때마다 그 불안감은 고스란히 엄마인 백씨에게 전해졌다. 여기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PC방을 전전하는 아들 때문에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다는 백씨.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무작정 양재천을 걸어요. 행여나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머리를 푹 숙이고 땅만 보고 걷다보면 어느새 5km를 걸었더라구요. 왕복 10km, 어떨 땐 두 번을 왕복하기도 했죠. 다리가 아파 걸음을 옮기지 못할 정도가 되니 마음이 좀 편안해지더군요.”
걷다보면 마음의 답답함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또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현실이 보다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고.
“아이들을 정말 잘 이끌고 싶지만, 아이들은 저마다의 그릇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아이들도 힘이 든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더라고요. 저만의 마음 추스르는 법을 찾고 나니 아이들에게도 잔소리를 덜 하게 돼 아이들과의 관계도 훨씬 나아졌어요. 둘째가 고3이 되는 내년에도 아마 양재천을 수없이 걷게 될 것 같아요.”
알뜰 쇼핑하며 스트레스 확~-장수연(40·방이동)
중1 외동딸을 둔 장수연씨는 마음이 울적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인터넷을 켠다. 인터넷 쇼핑을 하기 위해서다.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에 가도 제 옷이나 신발을 사는 건 언제나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큰 맘 먹고 나섰다가도 결국엔 남편 옷이나 딸아이 옷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니까요. 제 물건은 정말 화가 나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 인터넷 쇼핑으로 구입해요. 즐겨 찾는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예쁜 옷을 구경하다보면 마음이 좀 누그러지더라고요. 또 적지만 나를 위해 돈을 투자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장씨가 즐겨 찾는 사이트는 세일코너가 활성화되어있는 SPA 브랜드 인터넷 사이트. 평상시에도 30~50% 할인 품목이 늘 있고, 운이 좋으면 1+1행사나 추가 할인으로 큰 혜택을 볼 수 있다고.
“남들보다 저렴하게 알뜰 구매를 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아요. 배송이 되는 날엔 뿌듯함까지 느껴진다니까요.”
얼마 전엔 이월 상품 세일로 2만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으로 니트 카디건을 마련했다는 장씨. 그 옷을 득템하고 “이제까지의 우울했던 마음을 모두 날려버렸다”고 말한다.
백팔배로 삶을 필터링-윤영애 (52·송파동)
“비대해진 머리 대신 몸을 움직이고 싶었죠. 내게 백팔배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아주며 삶을 필터링하는 ‘나만의 의식’인 셈이죠.” 윤영애씨가 담백하게 말한다.
20년 전 석촌호수 부근의 불광사에서 운영하는 사찰 유치원에 딸을 보냈다. 널따란 법당을 아이들이 놀이터 삼아 뛰어 놀기 좋겠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도 불교와 인연은 없었다. 그러다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사십구제를 치르면서 조금씩 부처님이 마음속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불교에서는 백팔배가 번뇌와 죄를 씻는다는 의식이에요. ‘나는 죄인이오’라는 느낌이 개운하지 않아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피했어요.” 하지만 백팔배는 점차 종교의식이 아니라 잠시 일상을 멈추고 숨 고르기하는 ‘윤영애식 힐링’으로 자리잡았다.
이른 아침 혹은 늦은 밤 자신의 방에서 마음을 정갈하게 하며 절을 한다. 가족, 친지, 친구, 이웃 등 자신과 인연이 닿아있는 사람들 이름을 한명씩 차례로 부르며 마음속에 품었던 감사, 미안함, 격려의 멘트를 읊조린다. 약 30분쯤 땀이 송골송골 맺힐 만큼 정성껏 절을 하고 나면 복잡한 마음이 깔끔하게 정리된다는 그에게서 건강한 삶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단조로운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만화책-이지원(41·잠실동)
이지원씨의 중고교시절 유일한 일탈 공간은 만화가게였다. 만화책을 잔뜩 쌓아놓고 그림과 활자로 버무려진 이야기 속 세계에 파묻히다보면 시간은 후딱 지나갔다. 순정만화계의 대모 황미나를 비롯해 기라성 같은 당대 만화가들은 물론 일본 해적판까지 두루 섭렵했다. 대학생이 된 뒤 만화가게 출입이 점점 뜸해지다 나중에는 ‘추억 속 취미’로 파묻혀 버렸다.
30대 중반 즈음, 가정과 일에 치여 복닥거리며 사는 워킹맘의 단조로운 일상이 지겹고 삶의 판타지가 간절해질 무렵 동네 만화대여점이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들어가 손에 잡히는 대로 만화책 수십 권을 빌려왔다. 다채로운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만화 속 주인공들의 인생역정, 달달한 로맨스는 그를 단박에 매료시켰다.
그 뒤 주말만 되면 수십 권씩 빌려다 밤새 읽었고 만화는 일상의 스트레스와 가슴 속 울화를 다스리는 비타민제가 되었다. “웹툰이 대세라지만 만화책 속에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고스란히 묻어있어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인간사 희로애락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죠.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과는 또 다른 재미에요.” 그의 입에서는 만화 예찬론이 술술 흘러나온다.
종교로 마음의 안정을 찾는 나만의 힐링법-정지수 (41·풍납동)
정지수(가명)씨는 가을을 타는 편이다. 매년 계절이 겨울로 가는 길목에 들어서면 생각이 많아지면서 가족에게도 짜증을 내게 된다. 친구들과의 수다나 쇼핑도 그 때뿐이고 마음은 더 허해졌다. 정씨가 찾은 힐링방법은 천주교 피정이다. 천주교 피정은 신부님이나 수도자의 강의, 개인 성찰, 묵상, 고해성사, 침묵기도 등으로 이뤄진다. “원래 천주교 신자지만 그렇게 열심히는 아니었어요. 우연히 참여한 1박2일 피정을 통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저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적어도 1년에 한번은 꼭 피정을 떠나요.” 한번은 갑자기 시골에서 시부모님이 올라오셔서 피정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였지만 솔직하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남편과 딸아이를 맡기고 당당하게 피정을 다녀왔다고. 그 후에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족들을 대할 수 있었다. “볼 것, 먹을 것, 갈 곳도 너무 많은 요즘 세상이잖아요. 그 반대로 침묵과 명상을 통해 비우는 시간을 가졌는데 신기하게도 가득 채워져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비공개카페에서 속풀이하고 위로받아요-김원선 (38·상도동)
김원선(가명)씨는 초2 아들, 유치원 딸을 키우는 직장맘이다. 매주 주말이면 지방에서 올라오는 홀시아버지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재작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적적하게 지내시는 게 안됐지만 평일에 회사 다니는데 주말까지 쉬질 못하고 밥하고 청소하려니 너무 힘들다. 효자남편은 묵묵부답이고 친정엄마는 어른께 잘하라는 훈계성 멘트뿐이라 더 짜증나는 상황. 이때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 곳은 바로 그녀가 즐겨 찾는 주부대상 비공개 카페였다. 구구절절한 그녀의 신세한탄에 카페동료 회원들이 써준 말 한마디는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어 준다. 더 힘든 자신의 상황을 써 놓은 글, 힘내라고 응원한다고 ‘나중에 복 받을 것’이라는 단순한 글에 하나하나 댓글을 달다보면 조금씩 치유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는 게 그렇지 뭐, 남들도 나랑 비슷하게 힘들구나... 동료의식이랄까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요. 여자들의 수다는 정신건강에 좋다고 얘기하잖아요.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카페 가입이 주부들로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가능한 것 같다고 귀띔한 김씨는 자신도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엔 꼭 응원의 글을 달아 힘을 보태준다고 한다.
커피 향기 맡으면 우울했던 마음도 사라져요-강미영(44·잠실동)
평소 시중에 파는 커피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하고 있는 강미영씨의 힐링법은 ‘평소 선뜻 사 마시지 못하는 커피를 주저 없이 사는 것’이다. 워낙 커피를 좋아하지만 한잔에 4000~5000원씩 하는 커피전문점 커피를 마실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강씨. ‘5000원이면 집에서 커피를 몇 잔이나 타 마실 수 있는데......’라는 계산에 커피향을 그냥 지나칠 때가 많았다고. 그녀가 자신의 힐링법으로 ‘스스로를 위한 작은 호사’를 선택하게 된 건 1여 년 전부터다.
“아무리 아끼는 것도 좋지만 나 스스로에게 커피 한잔은 사 줘도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구요. 정말 기분이 꿀꿀한 날, 무작정 집을 나섰어요, 그리고 제일 큰 사이즈의 가장 비싼 커피를 주문했죠. 큰 종이컵을 들고 집으로 오는데 왠지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집에 오자마자 라디오를 켜고 소파에 몸을 묻고 한참 동안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었어요. 커피잔이 바닥이 보일 때쯤 마음이 편안해지던데요. 커피향과 함께 근심걱정이 다 사라졌다고나할까요.”
자신을 위해 주저 없이 투자를 한 데에서 오는 뿌듯함이랄까. 그 후로 강씨의 ‘커피힐링’은 1년 째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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