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버스들이 마치 관문처럼 이곳을 지난다. 빼곡한 노선만큼이나 정류장은 늘 사람들로 북적댄다. 지금 이 곳은 팔달문! 200여 년 전, 정조는 알고 있었을까. 화성을 건축하고, 버드나무를 심어 수원을 유경(柳京)이라 하며 조선의 경제중심지로 세우고 싶었던 그의 이상이 이렇게 이어지게 될 줄을. 정조의 개혁의지에 뜻을 둔 선비들이 수원으로 몰려들어 상인의 옷을 입고 수원의 유상(柳商)이 됐다. 그렇게 팔달문 주변은 다양한 상인들로 넘쳐나기 시작해 현재 수원에는 22개의 전통시장이 존재한다.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되고, 역사가 되었을 그 곳, 그 때의 추억을 더듬듯 수원의 전통시장 나들이를 떠났다.
오세중 리포터 sejoong71@hanmail.net
시장나들이1. 팔달문시장, ‘왕이 만든 시장’이란 새 옷을 입다
‘왕이 만든 시장’이라, 위용부터가 남다르다. 더구나 “팔달문시장은 200년 전부터 경기 남부권을 대표하는 시장”이었다고 팔달문시장 조정호 상인회장은 자랑스레 말한다. 팔달문시장 주변으로 지동, 영동, 미나리광, 패션1번가 등 9개의 전통시장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구색, 가격경쟁력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며 신동호 기획실장은 “없는 게 없는 초대형 할인마트”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세월은 늘 변수를 낳는다. 신도시가 생기면서 수원의 중심상권이 옮겨갔고 전성기가 무색할 만큼 시장 분위기는 차츰 가라앉았다.
“80~90년대엔 돌멩이를 가져다놔도 팔린다고 할 정도로 눈코 뜰 새가 없었지. 인계동에 삼성전자가 있어서 월급날이면 근로자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왔거든.” 25년째 팔달문시장을 지키고 있는 ‘헌트키즈’ 사장은 이젠 예전 같은 단골개념도 사라졌다고 털어놓는다. 그랬던 팔달문시장이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조성되면서 정조가 만든 시장이란 뿌리를 찾고, 브랜드화 됐다. 곳곳에 시장의 의미를 담은 현수막과 ‘불취무귀(不醉無歸)’라고 술 권하는 정조의 조형물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해졌다. 예전에 남문백화점이었던 건물을 무상 임대받아 상인방송국과 문화교실, 휴식공간도 만들었다. 고객서비스마인드를 가지고 고객과 함께 갈 수 있는 정 있는 시장을 꿈꾸는 상인들의 마음에도 새로운 의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고소한 통닭냄새, 순대국, 서민정취 따라 옹기종기 시장여행
화성축성과 함께 팔달문시장 내 통닭거리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세월을 말해주듯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가마솥 안에서 통닭이 튀겨지고 허름한 가게의 정취도 살갑기만 하다. 지동시장의 순대타운. 부담 없는 가격의 순대국 한 그릇을 마주하고 보니 창밖의 시장풍경이 그대로 세상사다. 팔달문시장 아케이드를 지나다 보면 영동시장 상가 입구가 보인다. 고운 한복과 수예, 침구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38~40개의 포목상이 들어서 있는데, 포목점으로 특화된 건 불과 15년 전부터라고 ‘수원주단’ 구형서 사장이 말한다. 수원상회로 영동시장에서 첫 번째 상호등록을 한 이후 70년, 이제 그는 어머님의 대를 잇고 있다.
“이런 주단집은 이젠 사양사업이죠. 우리는 좀 나은 편인데도 예전에 비한다면 좀 힘들긴 한 것도 사실이고요. 시장이 살아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지만, 좀 더 상인들의 목소리를 담고,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정책들이 되었음 하는 바람입니다.” 전통시장 활성화라는 이름 속에 무엇이 녹아들어있어야 할까. 신동호 기획실장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옛 모습으로 돌리는 것만이 복원은 아닌 것 같아요. 작은 것이라도 소중하게 간직했던 우리의 생각들, 이게 전통시장의 근본이 아닐까요.”
Tip. 팔달문시장, 이것만은 놓치지 말자!
▶유상박물관_ 시어머니의 대를 이어 떡집을 하는 며느리 김순애 씨, 물과 불로 가게터전을 잃고 다시 일어선 이준재 씨, 사람이 좋아 시장에 나와 있는 게 너무 좋다는 노점상인 신일선 씨... 상인들의 다양한 히스토리가 미니어처로 살아 숨 쉰다. 이런 이색적인 미니어처와 함께 팔달문시장의 유래, 정조의 개혁의지 등을 담은 동영상도 즐길 수 있다. 아이들에게 수원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주고 나름 역사공부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강추다.
(팔달문시장 종합안내소 2층에 위치)
▶전통시장 토요문화공연_ 12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4시엔 지동교 위 상설무대를 찾아볼 일이다. 팔달문시장을 비롯해 인근 9개 전통시장상인회가 주최가 돼 테마가 있는 음악, 무용, 댄스 등 공연을 펼친다. 체험부스, 바자회 등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시장나들이2. 못골종합시장, 웃음 한 바구니, 사랑 한 봉지를 담아
아케이드로 들어서자, 이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추석을 앞두고서였기 때문일까, 인파로 넘실대는 못골종합시장에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전통시장이 대형마트에 밀려 고전하는 분위기는 도통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명절이 아니더라도 평일엔 1만 명, 주말엔 1만5000명 이상이 시장을 찾는다. 그 이유를 못골종합시장 이충환 상인회장은 ‘소통’에서 찾는다.
“상인들 간, 시장과 고객의 소통이 사람을 시장으로 불러 모읍니다. 상인들에게는 라디오 ‘못골 온에어’, 밴드, 줌마불평합창단 등의 동아리가 친목 겸 소통의 창구가 되고, 축제, 못골문화사랑회의 지역행사 후원 등이 시장과 고객의 소통공간이죠.” 이 회장은 상인회를 비롯해 시장 내 젊은 피의 수혈도 활력의 요인이 됐다고 했다. 시장이 소문이 나면서 젊은 상인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가업으로 이어받겠다는 경우도 늘어났다. 가게를 새 단장하고, 판매 전략을 바꿔가며 장사수완을 펼치는 모습은 긍정적인 도미노현상을 만들었다. 시장 내 30~40대 비중이 40%, 고령화되는 전통시장의 밝은 미래다.
시장상인들만큼이나 고객들도 때마침 견학을 하러 온 유치원아이들, 젊은 새댁, 연세 지긋한 어르신 등으로 다양하다. 김 굽는 냄새, 튀김, 오뎅, 반찬 냄새 등 갖가지 냄새가 발길을 붙잡는다. 전어 한바구니 가득 5000원, 맛깔스런 송편 1팩에 2000원, 3팩 5000원. 오이도 5개 2000원, 호박 2000원 등 마트보다 싸고, 정은 푸짐하다. 이 회장은 이젠 ‘마트 갈까’가 아닌 ‘시장가서 전도 먹고, 장도 볼까’가 되는 문화가 됐으면 한다. 이것저것 한눈 팔 게 많은 재미 가득한 180m길이(못골종합시장 총 길이)의 놀이터에 어찌 안 놀러올 수 있을까. 주머니사정이 가벼워도 장바구니 가득 사랑을 담아가는 게 못골종합시장이다.
Tip. 못골종합시장의 즐길거리_ 이야기가 있는 상인요리교실
안전하고 신선한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상인들이 요리교실의 강사를 맡았다. 그들만의 특별한 비법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네마실 나온 듯 옹기종기 둘러앉아 만드는 요리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집에 갈 때 시장에서 바로 식재료를 살 수 있으니 더더욱 좋다. 다가올 11월의 요리교실을 기대하시라.
시장에서 만난 사람1. 충남상회 김인수, 권성숙 부부
“내가 76년도인가 왔을 때만 해도 여긴 그냥 담벼락이었어. 담 밑에서 조그맣게 좌판을 깔고 소금을 팔았었는데, 남들 안 하는 품목이다 보니 제법 장사가 잘 됐지.” 이젠 좋은 목에서 건어물가게를 크게 운영하고 있는 충남상회 김인수 사장의 소회다. 충남 예산에서 도심으로 올라온 지 어언 50년, 홀어머니를 모시고 우유배달, 야채배달 등 자전거 하나로 힘든 세월을 살아냈다. 이곳이 그에겐 하루 벌고, 하루 먹고 살았던 생활터전이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고 보니 친척보다도 더 가까운 게 시장사람들이야. 요즘엔 젊은 사람들이 시장 와서 일하니까 보기도 좋고, 힘도 나고, 시장이 많이 알려지니 더 좋지.” 인터뷰 중에도 끊임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여기 물건이 좋고 맛있다며 산자, 약과, 사탕, 북어 등 제수용품을 카트 한가득 사는 손님도 있다. 모두 해서 2만5000원 선. “가을, 겨울에는 산지에서 직접 가져오는 김이 맛있다”고 김 씨가 귀띔한다. 그만큼 품질로 승부한다. 아내 권성숙 씨는 잘 나가는 줌마불평합창단원이다. 노래는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시장 끝나고 연습을 하는데, 몸은 피곤해도 오늘 있었던 얘기들을 나누는 것 자체가 즐겁고,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환하게 웃었다.
시장에서 만난 사람2. 종로오뎅 임용운
시장에서 오뎅장사를 하던 후배의 권유에 못골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게 30년 전, “지금은 시장에서 유일하게 오뎅을 직접 만들어 파는 곳”이라고 임용운 사장은 자랑한다. 온도조절이 가장 중요한데, 오뎅 튀기는 기술자에게 석 달 동안 월급을 줘 가며 배웠다. 기름에 덴 이곳저곳의 영광의 상처들이 그간의 세월을 말해준다. 떡, 깻잎, 햄, 맛살 등 다양한 재료를 감싼 오뎅이 막 튀겨져 나온다.
“우리나라는 까다로운 식품규정 때문에 반죽을 다 받아서 사용할 수밖에 없지. 직접 반죽까지 해서 나만의 오뎅을 만들고 싶은 게 바람이라면 바람이랄까.” 그의 오뎅에는 그만의 자부심이 고소하게 녹아있다.
시장나들이3. 장안문거북시장, 정조시대 영화역의 전성기를 꿈꾸며~
4월, 새숱막(새수막) 거리 축제로 장안문거북시장 일대가 들썩거렸다. 전국 산지의 양조장에서 올라온 막걸리 맛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막걸리 제조 시연과 장영외영 군사훈련 시연 등 축하공연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축제분위기. 정조대왕도 등장해 축제를 즐긴다.
“올해로 두 번째 열린 ‘새숱막 거리 축제’는 장안문거북시장의 200여 년 전을 회상하게 만드는 축제”라고 장안문거북시장 차한규 상인회장은 설명했다. 화성축성과 더불어 장안문 밖 바로 이곳에 영화역과 특수부대였던 장영외영의 훈련장이 들어섰고, 주변으로 여관과 술집들이 늘어서게 된 것이 새숱막 거리(새로 술집들이 들어선 거리)였다. “이 일대가 다 마굿간이었다고 보면 된다. 말이 쉬어가고, 사람들도 성 밖에서 흥청망청하며 놀 수 있었던 거리였다”고 30년 째 이곳에서 ‘충남부동산’을 운영하는 김영부 씨가 역사의 한 자락을 전해준다. ‘장안아구탕’ 김복기 씨는 “23년 째 장사를 했는데, 13~14년 전이 최고의 전성시대였지 싶다. 북문 종합터미널이 있고, 서울로 가는 택시들이 24시간 대기하는 길목이었다. 당시 먹자 골목하면 팔달문, 장안문 밖에 없었으니까, 그때 돈들 많이 벌었다”고 했다.
그렇게 현대화의 거센 바람에 밀려 쇠퇴했던 장안문거북시장이 느림보타운이란 이름을 입고 다시 기지개를 켰다. 당시의 영화를 되살려보겠다는 의지로 2016년까지 전신주 지중화 등 시장경관 정리, 전주객사와 같은 느낌의 영화정 복원, 주차장 증축 등을 하게 된다. 시장 내 400여 개의 가게가 대부분 먹거리다 보니 특성을 살려 일 년 열두 달 축제도 만들었다. 당장은 10월12~14일 느림보타운음식축제가 기다리고 있다. “다른 전통시장들에 비해 느린 걸음으로 시작했지만, 멀리 지방에 사는 친구들도 ‘새숱막 거리 축제’가 뭐나며 물어올 때 가능성을 봅니다. 특히 시장엔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야 해요. 오랜 전통을 가진 가게들의 음식 맛에 젊은 취향의 분위기만 잘 갖춰진다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젊은이들을 위한 서비스나 프로그램은 그 이후에 순차적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고요.” 아빠가 상인회장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놀 게 없다며 수원역에서 주로 만남을 갖는 아들부터 시장을 찾아오기 시작한다면 성공한 게 아니겠느냐며 차한규 상인회장이 웃어보였다. 마지막 한마디를 건네는 차 회장.
“우리 시장에서도 온누리상품권 환영합니다. 맛있는 음식 드시러 많이많이 오세요.(웃음)”
Tip. 열두 달 축제로 즐기는 장안문거북시장 캘린더
1월 영화역 고유제-시장 번영 기원
2월 정월대보름축제-상인, 주민, 고객의 어울림 한마당
3월 장승제-장승을 깎아 세우고 제 지내기
4월 새숱막거리축제-술을 빚어 나눠먹기
5월 연등제-사월초파일 거북시장길에 연등 밝히기
6월 손님맞이 영화축제-‘손님을 임금처럼 모시겠다’는 구호를 외치며 정조의 화려한 행렬을
맞아들이는 모습 재연
7월 거북축제-고객의 장수를 기원하며 전통음식 나눠먹기
8월 느림보타운 가요제-한여름 밤 가요경연대회
9월 느림보타운음식축제-먹거리 주제 음식경연대회, 먹거리 나누기(올해는 10월에 개최)
10월 영화동 당제-음력10월1일 정조가 당제를 모셨던 기록을 토대로 역마산에서 개최
11월 영화풍물놀이 한마당-영화역과 영화관의 중요성을 알리는 행사
12월 크리스마스 축제-점등행사, 거리 음악회 등 개최
(굵게 표시된 축제는 꼭 챙겨두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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