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더 싫어 졌어요. 선생님이 0교시, 7교시, 쉬는 시간, 심지어 점심시간에도 ‘아그그’(실력 쌓기 교수·학습자료 ‘아하, 그렇군! 그랬어~’)랑 기출문제집만 풀라고 해요. 점심을 늦게 먹으면 그만큼 더 풀어야 해요.”
“합체(합동체육) 시간이 제일 신나는데 그 시간에 문제 풀어요. 여름 체육복이 어디 있지도 모르겠어요.”
“쉬는 시간도 완전 ‘에바’(error+over의 신조어)에요. 뒷문을 잠그고 앞문을 지키고 있는 선생님 쪽으로 나가야해서 오줌 참을 때 많아요.”
고3 수험생의 말이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들의 말이다. 26일에 치를 예정인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보는 학생들은 이처럼 문제풀이를 강요당하고 있다. 해당 학년은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이다.
교과서 대신 문제집 푸는 교실 =
당초 기초학력 미달자를 가리기 위해 추진된 학업성취도 평가가 학교운영을 파행으로 이끌고 있다.
전교조 대전지부는 지난 18일 ‘대전지역 초·중·고교 10곳 중 7곳이 교육과정을 파행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전교조가 지난 4일부터 12일까지 대전지역 초·중·고 분회장 270여명(75개교 75명 응답)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평가 관련 온라인 설문을 벌인 결과다.
또 문제풀이만 강요하는 ‘전집형 평가가 학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가’에 대한 물음에 응답자의 97.3%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해 학업성취도 평가에 대한 실효성 논란을 제기했다.
전교조는 18일부터 26일까지 현장교사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시험 당일 ‘학업성취도평가 표집화 요구’ 민원 제출 투쟁(조퇴투쟁) 등을 벌일 계획이다.
권성환 전교조 대전지부장은 “일제고사 결과를 각종 성과에 반영하는 평가방식에서는 편법이 동원되기 쉬운 게 현실”이라며 “일부 초등학교에서 단기성과위주의 야간자율학습이 번지는 등의 부작용이 확인되고 있는 만큼, 평가방식과 성적공개에 대한 교육당국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일제고사’로 불리는 학업성취도 평가는 당초 ‘기초학력 미달자’를 가려 그에 맞는 ‘맞춤식 교육’을 실시한다는 취지로 실시했다. 그러나 평가 결과로 학교의 순위가 정해지면서 학교서열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결국 학업성취도 평가를 보기 전까지 정상적인 학교 교육과정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문제 풀이에 지친 아이들 … 왕따·폭력으로 표출 =
아이들은 지나친 문제풀이와 늘어난 수업 시간으로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입을 모은다.
동구 ㄴ초등학교 박종서군은 “매일 문제집 풀고 모듬 중에 많이 틀린 아이가 나오면 모듬 전체가 다 남아서 몇 장을 더 풀어야 한다”며 “학교에서 ‘친구 사랑’ 글짓기 대회도 하면서 왕따 없이 사이좋게 지내라는데, 그게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또한 “많이 틀려서 다른 애들에게 피해를 주는 아이도 싫어하지만 어려운 문제를 혼자 풀어서 선생님께 칭찬받는 아이도 ‘따’ 당한다”고 말했다.
대덕구 ㄷ 초등학교 김다래양은 “학교 끝나고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한 시간 노는 것은 혼나도 교실에서 문제 풀고 있으면 아무리 늦게 끝나도 안 혼난다”고 말했다.
같은 학교 학생인 한아름양은 “아침 자율 학습 시간에 하는 사물놀이 활동이 정말 좋았는데 지금은 못한다”며 “오자마자 가방 정리하고 문제부터 풀어야 하는 학교생활이 정말 싫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덕구 ㄱ초등학교 6학년인 박영애양은 “우리들의 학업 수준을 나라에서 알고 싶다면 불시에 시험을 봐야 정확한 실력이 나오지 않느냐”며 “틀린 문제는 그저 오답 노트에 베껴 쓰기만 해서 채점하기 전에 친구 답을 컨닝하는 애들이 많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보는 학부모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중구에 사는 장윤정(39) 주부는 “학교 영어수업에 만족할 수 없어 학기 초에 영어 학원을 추가했는데 짜증만 부쩍 늘어 동생한테 화풀이하는 일이 많다”며 “학업성취도 평가 후 8일 뒤에 기말고사까지 있는데 큰일이다”고 안타까워했다.
익명을 요구한 중구의 한 초등학교 김 모 교사는 “활동량이 많은 초등학생들을 8시간 이상 학교에 잡아두니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학우나 후배 괴롭히기 형태로 스트레스를 표출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며 우려했다.
대전시 교육청 “선의의 경쟁으로 봐달라” =
대전시 교육청은 사정이 이런데도 금시초문이란 반응이다. 교육청 홍미숙 장학사는“학기 초 각 학교장들에게 ‘문제풀이에 집중하는 수업 형태를 지양하라’는 공문을 보냈다”며 “파행으로 운영하고 있는 학교가 많다면 다시 공문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각 학교가 두 달여간 지속해온 파행 운영을 현재까지 실태조사조차 안했다는 얘기다.
홍 장학사는 “학교장끼리 과열 경쟁을 하는 것 같다”며 “선의의 경쟁으로 봐달라”고 말했다.
작년 대전 ‘기초학력 미달자’는 초등학생의 경우 0.6%를 기록했다.
안시언 리포터 whiwon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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