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있고, 추억이 있고, 또 희망이 있고, 미래도 있다. 서점은 그런 곳이었다. 세월이 흘러 서점도 변했다. 클릭 한번이면 책이 집까지 배달된다. 만남도, 추억도 생략되어지는 디지털 시대, 서점이라고 다를 리 없다. 서울의 명동이라고 할 만큼 사람들로 북적대던 수원남문엔 15~20여 년 전만해도 7~8군데가 넘는 서점과 10군데의 헌책방이 있었다. 지금은 한두 군데의 서점과 헌책방만이 남았다. 길게는 40년 넘게 수원의 역사와 함께했던 이들, 그 뒤안길에서 서점을 만났다. 젊은 날의 열정으로 행복했던 그 때 그 시절, 서점이야기는 헌책방나들이에서부터 시작한다.
도움말 경기서적(카페공감 좋은책방), 교문서적-더 북스, 동남서적, 오복서점
오세중 리포터 sejoong71@hanmail.net
#1. 잊혀져가는 아날로그, 헌책방 그리고 사람들
때마침 믹스커피향이 지하의 오복서점 안을 그윽하게 물들인다. 주인장 안정철 대표가 내어주는 커피를 받아들며 김한설 씨가 넋두리하듯 이렇게 털어놓는다.
“30년 넘게 수원에 살았는데, 하루에 한번은 꼭 여기를 들른다니까.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말이야.” 지나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진다고. 10년 이상 오복서점 단골이라는 허시중, 유정수 씨 역시 ‘오복예찬’을 늘어놓았다. 수원, 서울을 찍고 어릴 적 놀이터였던 남문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헌책방이 있어 정말 반가웠다는 허시중 씨는 “사장님도 부담 없이 대해주시고, 좋은 분들도 만나고, 여기가 오복사랑방”이라고 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학교수, 지식인, 종교계 인사, 팔순을 넘기신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참고서나 아동도서 등 재고도서를 30~40% 이상 싸게 팔다보니 학부모들이 자녀와 찾아오기도 해요. 그래도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은 편이죠. 독서는 습관이자 생활이라고, 책을 보던 분들만 계속해서 보시거든요.” 올해로 22년이 됐지만, 수원은 책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며 안 대표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인구 120만에 헌책방이 한두 개, 서글픈 현실이다. “자존심이 구겨지는 얘기”라며 김한설 씨가 한마디 거든다. 남은 헌책방도 해가 거듭될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인터넷서점(www.obookstore.co.kr)도 운영해보지만, 여의치는 않다. “다른 걸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사실 굴뚝같지만, 대안이 없다 보니 이러고 있다”는 안 대표는 사명감 같은 건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한부인생처럼 그날그날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여기 문 닫으면 우린 갈 데도 없고, 큰일이지. 그런데 보면 알잖아~, 이렇게 반나절 이상 앉아있어도 손님 한 두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데, 자리를 지켜달라는 건 내 욕심이지….” 헌책방마니아이자 오복사랑방 가족들의 안타까운 마음이 김한설 씨의 얘기 속에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누군가의 손을 거치고 거쳐 이곳을 파고들어온 헌책들, 예서 풍겨져 나오는 닳고 닳은 오래된 채취와 빛바랜 흔적이 조명 아래서 더욱 처연하게 느껴졌다.
교복을 차려입은 반가운 고등학생 손님이 오복서점을 찾아왔다. 익숙한 듯 잘 정돈된 책꽂이 사이를 거닐며 여유롭게 책을 고르는 모습이 신선해 보였다. 그에게 간택되어질 오늘의 책은 뭘까. 오복서점의 늦은 오후,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기도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2. 전성기부터 쇠퇴기까지, 서점의 극과 극 인생사
▷삶, 사랑, 열정으로 취했던 전성기 VS 디지털문명에 밀린 쇠퇴기
수원의 서점은 7,80년대를 거쳐 90년대 초중반,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남문이 수원의 중심상권으로 성황을 이루던 때, 1969년 교학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지금의 동남서적은 1,2층 규모에 직원 12명을 거느린 남문 일대의 터줏대감이었다. 영동사거리의 녹산문고, 수원역 근처의 경기서적도 수원을 대표하는 서점으로 바쁜 세월을 보냈다. 한마디로 재미가 있었다. 북적거림만큼이나 앎에의 열정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런 손님들에게 책을 안내해주고, 설명도 곁들여주던 직원들까지 어우러져 서점은 그야말로 사람냄새가 났다.
2000년 들어서면서 서점은 컴퓨터, 스마트폰 등 모든 문명의 이기에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했다. 90년대 말 도서정가제가 무너지면서 할인경쟁에서 밀린 작은 서점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영통 등 신도시로의 인구유입으로 남문의 전성기도 급속히 쇠락했다. 녹산문고도 얼마 전 지하로 이전했고, 동남서적도 2층은 거의 운영하지 않는 상태다. 동남서적 이귀근 점장은 “정보화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는 오프라인서점”이라고 했다. 궁금한 건 인터넷으로 해결하고, 전자책을 구입해서 보는 시대, 길 잃은 서점은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다.
▷2012년 현재_ 생계의 문제, 할인경쟁 피할 수 없어
아주대학교 앞, 더 북스(구 교문서적)에서 만난 서동환 수원시서점조합연합회장은 “15~20년 전 150명이었던 회원이 이젠 20여명 밖에 되지 않는다”며 씁쓸해했다. 1980년대 중반, 4평으로 서점을 시작했을 때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던 예닐곱 개의 서점들도 이젠 사라지고, 두 곳만이 남았다. 서 회장은 그렇게 당시의 추억 한 자락을 꺼내들었다.
“주변 상권이 발달해있지 않았을 때다 보니 유신고 등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이 여기를 제 집 드나들듯 했어요. 같이 공도 차고, 축구중계도 보면서 정도 쌓았었는데, 그래도 그런 학생들이 장성해서 결혼 후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뿌듯하기도 하고 참 고맙더라고요.” 추억이 서린 그의 교문서적은 얼마 전 ‘더 북스’라는 이름을 갈아입었다. ‘북센’이란 도서 도매상과 협력관계를 맺고, 서로 매출을 신장해보자는 일종의 자구책이다.
“마진이 적더라도 서로 과다한 할인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게 서점의 현실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선 당장에 싸게 사니 좋을 수 있지만, 할인은 도서정가의 상승을 가져오고 이런 부담은 소비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는 서 회장은 도서정가제 시행과 학원에서의 책 판매 금지 가 제대로 이뤄져야 남아있는 서점들이 제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학생들 참고서나 자습서 위주로 품목할인을 하죠. 학생들을 상대하지 않으면 서점 운영이 어렵거든요. 그나마 소규모 서점은 이렇게 할인하기도 쉽지 않은 게 당장 생계문제가 달려있거든요.” 1년 365일 연중무휴에, 부부가 함께 식사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 동남서적 이귀근 점장은 수원에선 경기서적 천천점, 동남서적 단 두 곳만이 교과서 판매처로 지정돼있어 그래도 여기서 자부심과 위안을 삼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3. 서점, 카페로 새 옷을 입고 책과의 소통을 붙잡다
2011년 8월, 수원역 근처에 북카페가 문을 열었다. 나무색의 단아한 건물 1층엔 서점, 2층은 카페가 들어서 젊은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책을 사들고, 카페에서 은은한 커피향을 즐기며 책을 읽는 모습, ‘카페공감, 좋은책방’의 황군자 대표는 이런 그림을 꿈꿨다.
“수원역 주변의 다양한 문화 가운데 서점이 살아있다는, 일종의 존재감을 알리고 싶었어요. 카페는 서점의 부수적인 개념이었는데, 어떻게 서점보다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더 많더라고요.” 정작 카페에 앉아서도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가지고 각자 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카페손님 100명 중 한두 명 정도가 책을 읽을까, 카운터 옆 ‘카페공감이 추천하는 책’은 괜한 공염불이지 싶을 때도 있다. 휴대폰 속 책에 익숙한 그들에게 도무지 종이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이지만, 황 대표는 여전히 1층 서점에 참고서, 전공서가 아닌, 단행본, 인문사회, 취미, 교양서 위주의 책들만을 고집한다. 복합문화공간으로 유명했던 경기서적답게 문구류도 구비해놓았다. 1979년 수원에선 드물게 2평 공간의 사회과학서적 전문서점으로 출발, 90년대 도서?음반?문구류를 함께 판매했던 그대로 경기서적의 맥을 잇고 있다. 황 대표는 “하지만, 99년 IMF가 찾아오고 우리나라에도 신자유주의가 들어서자 취업이 중요해지면서 인문사회서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당시 젊은이들의 꿈, 열정, 열망도 사라진 지 오래”라며 말을 보탠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경기서적 명함이 가장 좋다. 20대부터 시작해 젊음을 이곳에 바쳤고, 좋은 책으로 돈도 벌었고, 자존심도 지켰고, 지금까지 행복했기 때문이다.
“서점도 더불어 살아야 해요. 손님들 중엔 왜 여긴 할인도 안하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우리 같은 큰 서점들이 자기자리를 지켜줘야 소규모 서점들도 함께 갈 수 있지 않겠어요.” 일본이나 유럽은 인터넷서점의 할인을 정책적으로 막아 오프라인서점이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다는데, 솔직히 우리나라의 서점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고백한다.
구닥다리 아날로그라고 해도 좋다. 종이책의 맛을 알고, 책 읽는 습관을 들여, 마음을 살찌우고, 인생이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진정한 책의 정서와 만날 수 있기를…, 서점사람들은 그게 서점을 지키는 가장 행복한 이유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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