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두남리 농가. 박영기씨는 오늘도 새벽 5시 50분에 어김없이 일어나 농장으로 향한다. 잘 자고 일어난 젖소들도 밤새 차오른 젖을 시원하게 풀어줄 영기씨를 기다리고 있다.
새벽 6시와 오후 4시, 박씨는 하루 두 번 젖소의 젖을 짜러 농장으로 간다. 젖소 45두의 젖을 한 번 짜는 데 걸리는 시간은 꼬박 3시간, 하루 두 번 7~8시간 365일 단 하루도 거르지 않은 일상이다.
책 짓는 농사꾼
박씨는 자신을 책 짓는 농사꾼, 번역하는 농사꾼으로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는 최근까지 두 권의 책을 번역해 세상에 내놨다. ‘성서와 대안 좌파’ 그리고 ‘욥의 노동’이다. 두 권 모두 종교관련 정치철학서다. 만만한 내용이 아니다.
그는 법학도로 90년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원에서는 신학을 전공했고 미국 유학을 가서는 정치철학을 공부했다. 유학 중 IMF라는 거대한 시류에 부딪혀 유학을 접고 돌아와 바로 농사꾼으로 전업했다.
“부모님들의 반대가 가장 큰 벽이었죠. 유학까지 보낸 아들이 농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어느 부몬들 쉽게 허락을 했겠어요.”
그가 농사꾼으로 평생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김지하 시인의 ‘생명’이란 시집과 ‘녹색평론’을 구독해 읽으면서 전공과는 무관하게 귀농을 평생의 화두로 심었다.
“‘논밭’ 출판사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일종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첫 책을 발간하고 그는 갈등이 깊었다. 그가 세상으로 손을 내밀자 세상 역시 그를 원했다. 강연 요청과 이런 저런 소모임을 하자는 제안이 이어졌다.
서울의 한 교회에서 강연 요청이 있었을 때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젖소들의 젖을 짜고 강연 장소에 겨우 닿아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강연을 마치고 또 허겁지겁 와 젖소들의 젖을 짰다.
책의 출간 소식을 들은 한 동창은 서울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자며 여러 차례 전화를 해왔다. 하지만 교회 강연 때와 마찬가지로 오가는 거리와 시간을 생각하면 한 달에 한 번도 흔쾌히 참석한다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그에게 친구는 뭘 그리 비싸게 구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박씨가 세 번째로 세상에 선보일 책은 프랑스 작가가 쓴 ‘간헐성(intermittency)이란 책이다.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주제다. 그는 지금 그 간헐성에 매료되어있다. 자신의 평범한 일상과 기계적인 삶 속에 잠복해 있는 고민과 의지들이 어느 날 세상이란 광맥과 제대로 만나 화산이 폭발하듯 용솟음 쳐 오를 날을 기다린다.
박씨는 단호히 “모든 노동은 잔혹하다”고 말하면서도 현재의 화두는 “노동에 더 밀착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번역을 하는 과정도 농사일을 하는 것과 똑같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견지해나가는 작업이다.
“농사로 인한 참 노동의 맛을 알 때 ‘논밭’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하고자 하는 말도 더 강건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제가 세상과 소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믿어요.”
지남주 리포터 biskett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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