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날인] 영동일고 3학년 김은성

‘게임중독에서 전교 1등’ 역전 드라마는 현재진행형

지역내일 2012-04-13

 “기숙사 생활이 너무 재미있고 공부도 잘 되요. 매일매일 MT 온 기분이에요.” 학교 기숙사에서 만난 김은성군은 환하게 웃었다. 잠실에 위치한 영동일고는 인문계고 가운데는 드물게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전용 독서실, 인터넷실 등을 갖춘 기숙사에서 소수정예 학생들은 ‘특별한 고교 생활’을 보내고 있다.
 새벽 6시 기상, 새벽 1시 취침. 학교 수업과 방과후 프로그램 시간 외에는 기숙사 독서실을 우직하게 지키고 있는 김은성군은 문과 전교 1등이다. 하지만 그가 솔직하게 털어놓는 ‘과거의 김은성’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게임, 만화, 판타지소설에 빠지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또래 아이들이 크레파스를 잡고 있을 때 대신 나는 마우스를 선택했어요. 온종일 게임만 했지요.” 부모님은 맞벌이로 항상 바빴고 늘 집에 혼자 있었던 김군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타크래프트 게임에 빠져 살았다. 이사를 자주 다녀 친한 친구도 없었고 학교에서는 조용히 자리만 지키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중학교 시절이 그에게는 암흑기였다. “부모님의 불화가 극에 달했어요. 학교에서는 엎드려 자고 학원은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집에서 게임하거나 만화책, 판타지 소설을 읽었어요. 하루 6시간 넘게 만화책만 본적도 많아요.” 학교에서는 여전히 존재감 없는 얌전한 아이였다.
 중3 때 부모님이 이혼,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된 뒤부터 김군의 심경에 변화가 찾아왔다. “힘들게 사업을 꾸려가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염치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여전히 PC게임에 빠져 사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혼을 내는 대신 ‘너를 믿는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셨어요.”
 그 무렵 김군은 인생의 멘토를 만난다. 영어 학원을 운영하는 누나 친구의 아버지가 틈나는 대로 그를 불러 마음을 다독거려 주며 공부법을 조언해 주었다. 덕분에 영어 과목만은 손에서 놓지 않고 꾸준히 공부했다.

‘공부 DNA’를 발견하다
 고교 입학 후 처음으로 ‘공부를 해야 겠다’고 다짐이 서자 중간고사를 앞두고 벼락치기를 했다. 결과는 전교 9등. 난생 처음 받아보는 좋은 성적표에 본인도 ‘쇼크’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공부 DNA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학교 시절 죽도록 만화와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서 독해력이 길러졌고 ‘잡학다식’해졌어요. 또 게임을 통해서는 집중력이 길러졌지요.(웃음)” 성적이 상위권으로 오르자 주위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1 겨울방학이 터닝 포인트였다. “수학이 계속 발목을 잡았어요. 독하게 마음먹고 방학 내내 수학 한 과목만 붙잡고 늘어졌어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는 풀이 과정을 몽땅 외웠어요. 그렇게 시간이 쌓이니까 서서히 수학공부에 탄력이 붙었어요.” ‘수학의 벽’을 넘은 뒤로는 역사 공부에 매료되었다. 시대별로 얽히고설킨 정치 이야기가 재미있어 책을 찾아보거나 인터넷강의로 예습하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고2 때 기숙사에 입소한 뒤로 일상의 고삐를 더욱 단단히 죄었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또래 친구들을 보니까 정신이 번쩍 났어요. 아무래도 집에 혼자 있다 보면 게임의 유혹을 이기기 어렵거든요. 기숙사 생활을 한 뒤로 성적도 상승세를 타고 있어요.”

독기 품고 공부하자 전교 1등
 지난해 삭발까지 하고 독기를 품으며 공부하는 그를 담임인 최희훈 교사가 눈여겨보았다. “널 믿는다는 선생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됐어요. 단역 배우에서 어느 날 갑자기 벼락 스타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무엇보다 나 스스로 자신감을 갖게 된 점이 최고의 선물이죠.” 공부에 두각을 나타낸 뒤로는 학급회장, 기숙사 대표를 맡으며 리더십도 키워나가고 있다.
 김군은 게임 때문에 엄마와 지독하게 갈등을 겪었던 중학교 시절을 돌이켜 보며 담담히 말한다. “꿈도 없었고 딱히 할 게 없다 보니 당장 눈앞에 있었던 PC게임에 중독되었던 것 같아요. 도피처였던 셈이죠. 비겁했어요.”
 지금 김군은 재혼한 엄마, 누나와 함께 산다. 매주 일요일에는 아버지와도 함께 시간을 보낸다. “부모님은 오히려 이혼한 뒤 친구처럼 지내세요. 이제는 네 식구가 함께 식사도 자주 하면서 쿨하게 지내죠. 나는 ‘부모님의 선택’을 존중하고 이해해요. 다만 주위에서 이혼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의젓하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은성군의 꿈이 궁금했다. “행정고시를 봐서 경제 관료가 되고 싶어요. 우리나라 산업의 밑그림을 내 손으로 그려보고 싶어요. 대학 전공도 이 분야를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의 롤 모델은 엘리트 외교관인 외삼촌. 영어, 일어, 중국어, 스페인어에 능통하고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외삼촌을 항상 동경하며 자란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이다.
 지독한 사춘기 방황을 끝내고 뒤늦게 ‘공부의 맛’을 알게 되었다는 김군. 앞으로 남은 고3 시간 동안 더욱 공부에 올인 해 멋진 역전 드라마를 완성하고 싶다며 수줍게 웃었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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