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소재로 다룬 영화 ‘건축학개론’이 화제다. 개봉 3주째 예매율 1위를 기록하며 극장가에 첫사랑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남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축학개론’은 여성 관객은 물론, 특히 남성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여자는 현재의 사랑에 집착하고 남자는 과거의 사랑에 집착한다고 했던가.
영화 ‘건축학개론’은 ‘건축’과 ‘첫사랑’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접목시킨 섬세한 연출과 함께 영화 전반에 흘러나오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9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아날로그 감성을 충분히 자극한다.
우스갯소리로 이 영화는 부부가 같이 보면 싸움난다는 말이 있지만 영화 상영 중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는 비단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 순수했던 그 시절의 애틋함을 추억하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아줌마 아저씨가 된 3040세대의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영희 리포터 lagoon02@hanmail.net
아줌마들의 첫사랑
어느덧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있겠지···
“내 사랑은 어쩌면 그토록 가벼운지 40 평생 살면서 마음이 갔던 남자들 줄을 세우면 한 다스는 될 것”이라며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는 최수진(가명·40) 씨.
얼마 전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며 감상에 젖었다는데. “워낙 사람을 쉽게 좋아하는 성격이라 누가 첫사랑인지 가늠을 못하겠어요. A인가 싶었다가 B인 것 같기도 하고 C도 생각나고. 그래도 돌이켜봤을 때 가장 궁금한 사람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짝지였던 제이. 사랑이라고 이름하기는 애매하지만 그 친구를 보면서 설렌다는 감정을 느꼈던 것은 확실히 기억해요. 4학년 때인가 전학을 가버려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고 3 때 우연히 독서실에서 다시 보게 됐죠.”
제이는 여전히 잘 생겼고 훤칠했다. 그런데 180cm가 훌쩍 넘어가는 키에 다리가 너무 짧아 그 비율이 정말 안습이었다고. 그 모습을 보며 괜히 속이 상했다는 최씨다.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에 갔다는 소식을 끝으로 더 이상 그 친구의 소식은 알 길이 없지만 어린 시절 풋풋했던 감정은 아직도 아스라하단다.
“첫사랑 상대를 못 잊는 경우도 있지만 그 시절, 순수했던 내 감정이 소중한 것일지도 몰라요. 제이도 이제는 배가 나온 중년의 모습이겠지만 늘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해요. 솔직한 마음은 우연이라도 한 번쯤은 다시 봤으면 하는 거”라며 쑥스러운 듯 웃는 최씨다.
“첫사랑이랑 결혼해봐~.”
영화 ‘건축학개론’, 드라마 ‘사랑비’ 등 걸쭉한 첫사랑 이야기가 화제인 요즘. 남들은 그런 영화나 드라마 보면서 옛 생각에 눈물도 흘린다는데 결혼 10년 차에 아들 둘 낳은 주부 황지영(가명·37) 씨는 눈물 한 방울 안 나온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아무리 되짚어도 떠오르는 건 남편 얼굴 뿐. 대학 1학년에 동기로 만난 남편이랑 소위 남들이 말하는 첫사랑 가늘고 길게 하고 결혼했다. 황씨 인생에 남자라곤 정말 달랑 남편 하나뿐이다. 인생에서 제일 잘못한 게 그거라는 황씨.
“한 해가 무섭게 아저씨로 변해가는 첫사랑, 옆에서 지켜보는 게 얼마나 씁쓸한지···. 정말 우리가 사랑을 했을까요? 아랫배 나오고 자기 일만 바쁜 남편, 내 인생이 허접하다는 생각도 가끔 들어요.”
요즘 들어 황씨는 잘 생긴 남자배우 보면 가슴이 뛴다. 10대에도 안 하던 짓을 하는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겠다고 한다. 청춘에 다 못한 사랑, 대리만족으로 어떻게 좀 해결하고 싶은 건지···.
“젊어서 가슴 아픈 사랑도 진하게 하고 남자친구도 많이 만나는 게 긴 인생을 생각하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아~ 20대 진한 추억 하나 없는 게 일생에 한입니다!”
첫사랑은 간직할 때가 아름다운 것
서진영(가명·34) 씨의 첫사랑은 대학에 입학을 하고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학교 동아리 선배를 혼자 짝사랑 하면서 시작됐다. 괜히 그 선배가 아르바이트하던 호프집에 죽치고 앉아 못 마시는 술 꽤나 마셨더랬다. 하지만 그 선배는 다른 동아리 선배언니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스토리는 거기서 끝이 났다.
첫사랑을 우연히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은 어디까지나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일까.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정말 집에서 입던 무릎 나온 바지에 커다란 박스티를 입고 화장도 안한 얼굴로 아이 둘 데리고 집 앞 슈퍼에 과자를 사러 가던 그 길에 첫사랑을 만날 줄이야...
“그래도 평소에 좀 차려입고 있을 때 만났다면 더 좋았을텐데요. 그날 하필 놀이터에서 꼬질꼬질해진 아이 둘을 양 손에 잡아끌고 윽박질러가며 슈퍼에 끌고 가는 그 우왁스러운 꼴을 그에게 보이다니... ”하고 말 끝을 흐리던 서씨는 자신에게는 설레임으로 간직되던 첫사랑의 기억이 그 사람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혹시 풋풋했던 새내기의 모습은 지워지고 아줌마의 모습으로 기억되진 않을까 안타깝다고 했다.
남편과 같이 영화보며 펑펑 울기까지
평소 남편과 함께 영화를 자주 즐기는 김미영(가명·39) 씨. 얼마 전 영화를 보러 갔다가 별 생각없이 ‘건축학 개론’을 택했고 영화 초반부터 흘러나오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선율에 마음은 어느덧 대학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다.
“입학과 함께 시작된 첫사랑은 순수했던 시절만큼이나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대학 선후배로 만나 늘 함께 다니다 선배가 군대를 가면서 마음이 멀어진 거죠”
몸이 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쉽게 말해 김씨가 고무신 거꾸로 신은 것. 그 뒤로 만난 적은 없지만 가끔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하다는 김씨는 지금의 남편에게도 첫사랑 스토리를 털어놓았단다.
“남편과 영화를 같이 보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휴지까지 꺼내 눈물 콧물을 닦을 정도로 펑펑 울었어요. 특별히 첫사랑이 생각나서 운 건 아닌데 남편에게 괜히 미안하더라구요”
하지만 김씨의 남편, 아무말 않고 손을 꼭 잡아주더란다. 김씨는 영화 주인공들의 사소한 오해로 인한 엇갈린 사랑이 안타까워 마음이 아팠고, 자신의 순수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더욱 마음 한켠이 아련하더란다.
남편 첫사랑 눈 감아줘도 될까요?
얼마 전 남편동기 모임에 같이 간 주부 조진희(가명·40) 씨. 결혼 전 자주 어울리던 남편친구들이라 별 부담 없이 갔던 자리에서 된서리를 만났다.
“남편이 건축공학과라 동기 대부분이 남자죠. 그런데 전설(?)처럼 전해오는 여자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친구들 모두 자기가 첫사랑이라 생각하더라구요. 바로 그 자리에 그 여자 친구가 나왔는데 남편을 비롯한 남편 친구들 그날따라 좋아서 죽더라구요. 하는 행동은 하나 같이 유치하고···.”
사실 조씨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10년 넘게 들어온 그 미모의 여자동기가 조씨 주변 여자들과 비교하면 평균 정도였다는 것.
“졸업 후 거의 못 보던 첫사랑 만난 남편은 거의 정신줄을 놓았더군요. 2차로 이동하는데 저에게 슬쩍 ‘2차는 동기들끼리 가게 그만 갈래?’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완전 어이 상실한 조씨, 겉으로는 쿨한 척 “그래, 동기들이랑 간만에 편하게 놀아”라고 말하며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서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곧 마음을 바꿨단다.
“나도 내 첫사랑이나 생각했어요. 인생에 스쳐갔던 이 남자 저 남자 이제 전혀 미안한 마음 없이 맘껏 생각할래요.”
아저씨들의 첫사랑
용기 내 고백할 걸 그랬나?
남들에겐 별 것 아니지만 자신에겐 아프고 애틋하다가도 괜스레 미소 짓게 만드는 처음 사랑. 김재훈(가명·42) 씨 가슴속 깊은 곳에 묻혀 있는 홀로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꺼내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김씨는 숫기 없는 부끄럼쟁이였고 그 여학생은 장난기 많고 활발한 예쁜 소녀였다. 둘은 과외 수업을 같이 받았고, 매번 그 애는 김씨를 놀려대며 깔깔 웃는 재미로 살았단다. 김씨는 화난 척 했지만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고.
언젠가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봤더니 그 애가 자전거를 타고 조심조심 따라오고 있었단다. 김씨는 놀란 가슴에 도망치 듯 집으로 달려갔고 그 애는 더 이상 쫓아오지 못했다고. “어쩌면 그날이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는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라며 그 날을 떠올리는 김씨.
초등학교 졸업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에 조금씩 들어와 홀로 사랑이 시작되었다는데. 그러나 여드름쟁이 남학생의 사춘기와 함께 그녀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존재
가 되었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에 연인을 태워 매일 떠나보내고 있었단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그녀에게 연락하는 것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으나 수필가 피천득이 아사코와의 세 번째 만남을 후회했듯이, 김씨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녀가 실제와 다름을 알기에, 그녀를 자신만의 홀로 첫사랑으로 영영 남겨 두었다고.
오해로 떠나간 그녀
학창시절, 전교회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박원영(가명·37) 씨. 주위엔 늘 여학생들이 따랐지만 박씨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첫사랑은 대학 2학년 때 배낭여행에서 만난 여대생이었다.
“보름간의 중국 여행에서 만난 그녀는 도전정신이 강한 당찬 여자였어요. 저와 말이 잘 통했고 봉사를 생활화할 정도로 마음이 따뜻했죠”
그 뒤 학교는 달랐지만 거의 매일 만나다보니 더욱 가까워졌다고. 하지만 박씨 주위의 여자들로 인해 오해를 사게 된 사건이 있었다. 박씨를 따르던 과 후배여학생의 부탁으로 영화를 보게 됐는데 그 영화는 첫사랑과 본 영화였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그녀는 박씨가 자신을 속였다고 오해해 떠나버렸다.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사랑에 있어서 특히 첫사랑은 사소한 오해들로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가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해만 아니었어도 제 인생이 달라졌을 지도 모르죠”
지금의 부인과도 열렬한 사랑 끝에 결혼했다는 박씨는 가끔 바가지 긁는 마누라를 보면 첫사랑이 생각난단다.
특별한 첫사랑 없어 아쉬워
“첫사랑 하면 특별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아쉽네요”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본 후 남자주인공의 가슴앓이가 오히려 부러웠다는 최진석(가명·44) 씨. 대학시절 주위엔 남자들로 득실대는 공대출신의 최씨는 여자 만날 기회가 적었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맘에 든 여학생이 있어도 제대로 말 한마디 못 붙여본 숙맥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남자주인공의 소심한 성격이 저와 비슷해서 공감이 가더라구요. 하지만 주인공처럼 첫사랑의 추억 속에 묻어둘 만한 여자가 떠오르지 않아 억울하기도 해요. 굳이 첫사랑을 말한다면 중학교 시절 교생선생님을 짝사랑한 게 전부네요”
남자들은 비가 오면 가끔 첫사랑을 떠올린다던데 최씨는 아이들이 우산 챙겼는지 걱정부터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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