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의 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한 대구 중학생 사건을 시작으로 학교폭력 문제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지만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해법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주교동에 있는 고양시택견전수관을 찾았다. 택견은 중요무형문화제 제76호인 우리 겨레 고유의 무예로, 상생의 정신을 중요하게 여긴다. 지난해에는 무예로는 세계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택견 하나면 깡패 만나도 겁 안나요
고양시 공무원인 지옥용 씨는 2006년부터 택견을 배웠다. 폐기물 불법매립을 단속하고 고소고발을 하는 일이 업무에 포함되다 보니 호신술이 하나쯤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꾸준히 수련해 1단까지 획득한 지 씨는 2007년과 2010년에 전국생활체육회 택견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전에는 깡패 같은 사람들이 오면 겁이 났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협박해도 두렵지 않고 자신감이 생긴 거죠.”
부드러우면서도 공격이 아닌 방어 위주의 기술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몸이 유연해지고 건강해졌다.
강봉규 관장은 “택견은 호신술로 익혀두기에 좋은 무예”라고 자랑했다. 맨손 무예로 장비나 도구가 필요 없다는 점도 호신술에 좋은 이유다.
“택견은 보호 장구를 하지 않아요. 딱 차서 맞으면 악 소리가 나는 무술과는 다르죠. 택견의 발차기에 맞으면 밀려서 넘어져요.”
강 관장은 이렇게 말하며 시범을 보였다. 부드럽게 공중을 가로지른 발이 몸에 닿자 상대방의 몸이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시합에서는 머리를 밀거나 발을 걸어 넘어트리면 한판승으로 끝난다. 시범을 통해 보니 부드러움 속에 강한 힘이 숨겨져 있다는 설명이 쉽게 이해됐다.
세 박자로 흥겨운 품밟기가 기본 동작
택견의 기본은 품밟기다. “이크 에크 에크”라는 세박자 구령에 맞추어 춤을 추듯 박자를 밟는다. 첫 박자에 부드럽게 무릎을 숙이고 두 번째 박자에 한쪽 발을 내밀며 쭉 한쪽 몸을 편다. 마지막으로 나간 발을 다시 거두어들인다. 뻣뻣한 동작이 없고 모두 살짝 구부리거나 버드나무가지처럼 낭창낭창하게 몸을 늘인 상태로 유지한다. 보기에는 쉽지만 기본 품밟기만 해도 땀이 흠뻑 난다. 허벅지 종아리 등 하체의 근육이 단련되기 때문이다.
노승영 씨는 2006년부터 택견을 배웠다. 생활체육으로 어울림누리에서 무료 강좌를 들은 것을 인연으로 지금까지 수련하고 있다. 그는 “택견의 품밟기가 하체 단련에 좋다”고 설명했다. “허벅지 엉덩이 근육을 쓰지 않으니 약화되는데 품밟기를 하면서 집중적으로 운동이 된다”면서 “현대인에게 아주 적합한 운동”이라고 말했다. 노 씨도 허리 통증으로 이런 저런 운동과 치료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다가 택견으로 좋아진 경우다.
“택견은 세 박자거든요. 우리의 전통 민요도 세 박자잖아요. 용어들도 우리가 평상시 쓰는 말이라 친숙해요. 한국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나 정서에 잘 맞아서 배우기도 쉽고 몸에도 잘 맞아요. 상대방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더 좋죠.”
강봉규 관장은 “부드러움 속의 강함이 택견”이라면서 “구름이 흘러가듯 물이 흐르듯 자유자재한 무예고, 기술 안에는 상생의 철학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 정서에 잘 맞는 무예인 택견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궁중부터 민간까지 고루 즐기던 무예
고려사에는 충혜왕 3년 5월에 ‘왕이 상춘정에 나가 수박희를 구경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재물보에는 ‘변, 수박을 변이라 하고 힘을 겨룸을 무라 하는데 지금의 탁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택견의 오랜 역사를 짚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흔적은 옛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바로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 대쾌도다. 우리나라 고유 놀이인 씨름과 택견을 즐기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당시 씨름과 택견이 대중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왜 택견 같은 맨손 무예를 즐겼을까? 강봉규 관장은 “모든 동물은 종족 보존의 본능에 의해 동료를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강 관장은 “초기 원시인들도 마찬 가지였을 것이며, 무기를 사용해 동족을 죽이는 대신 맨손으로 싸우는 격투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택견은 궁중에서 민간까지 고루 즐기는 무예였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맥이 끊겼다.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명문으로 순사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말렸다고 한다. 몇몇 택견꾼에 의해 해방 후 복원 됐다.
상생의 무예 택견에서 학교폭력 해결의 힌트를 얻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여산군에서 해마다 7월 15일에 가까운 전라, 충청 양도의 백성들이 한데 모여 수박으로 승부를 다투는 풍속이 전해 온다’고 쓰여 있다. 큰 잔치 때 벌인 택견은 동네의 꼬마들부터 나와 이기는 사람이 남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가장 잘하는 고수들끼리 마지막에 남아 실력을 거룬다. 이기는 마을은 그 해 논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다 한다. 서로 다치지 않게 배려하면서도 재미있게 놀 수 있었던 전통 무예 택견의 정신은 무엇보다 요즘 들어 절실하게 느껴진다.
노승영 씨는 “요즘 학교에서 폭력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자기 에너지를 분출하지 못하는데 택견이 역할을 해주면 어떨까 기대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반 안에서 서열을 정하려는 욕망이 있잖아요. 그것을 지금처럼 주먹이 아니라 택견으로 서로 다치지 않고 재미있게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옆에서는 장구 치고 북도 치면서 즐겁게 한바탕 노는 거죠.”
노승영 씨는 중고등학교에 택견 동아리가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마침 전수관에는 고교생인 양선호 군이 와 있었다. 양 군은 “여기 오면 쌓인 것을 풀 수 있어 좋다”면서 “택견을 배워 경호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얼핏 치마처럼 보이는 택견의 복장은 조선시대 무사들이 입던 철릭이라는 옷을 복원한 것이다. 품밟기라는 말부터 에크 이크 하는 구령, 눈꿈쩍이 활개짓 같은 동작 이름까지 택견은 다 우리의 것을 애써 살린 것이다. 잃어버린 무예의 전통을 하나하나 찾아 복원한 택견꾼들의 끈기와 노력을 본받는다면 학교폭력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너무 허황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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