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동아리 회원이 주연, 제작 맡은 단편영화 상영회

지역내일 2012-01-30 (수정 2012-01-30 오전 10:23:13)

아마추어 노인들의 ‘생애 첫 영화 데뷔기’






 # 못 참아
한 여름, 어느 버스정류장. 중후한 몸매의 그녀에게는 과자봉지가 들려있다. 버스를 기다리며 하나둘 과자를 꺼내 먹는 그녀. 버스는 좀체 오지 않고 과자로 향하는 손길이 조금씩 빨라진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은 채 TV를 시청하는 그녀. 손에는 여지없이 과자봉지가 들려있다. 이윽고 점점 바빠지는 손길. 조금 후 졸음에 겨워 소파에 누워서도 과자를 포기 못하는 그녀. 잠이 든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그녀의 입가엔 과자 부스러기가 댕그랗게 남아 있다.




# 어떤 하루
주인공 나삼식은 횡단보도에 서 있다.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지만 그는 얼이 빠진 모습으로 멈춰있다. 사진관에 들어선 나삼식. 사진사의 건조한 주문에 따라 무표정하게 사진을 찍는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썰렁한 집안에 들어선 그, 적막감을 느낀다. 무료하게 TV 채널을 돌리다 문득 허기를 느껴 주방으로 향하는 나삼식. 오늘따라 아내는 부재하고 어쩔 수 없이 밥을 차리는 손길이 못내 어설프다. 밥을 먹다 말고 배달 된 우편물을 뜯어보며 옛 앨범을 펼쳐보는 그에게 인생은 지나간 추억처럼 펼쳐진다. 화면은 다시금 첫 장면의 횡단보도. 대학병원 의사에게 암 선고를 받고 나온 나삼식. 그는 여전히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노인들의 리얼한 삶의 모습에 공감



지난 1월 13일 분당노인복지관에서는 이색적인 단편영화 상영회가 열렸다. 이번 상영회가 주목을 받은 것은 감독과 주연을 맡고, 제작에 참여한 이들이 평균나이 70세를 훌쩍 넘긴 노인들이라는 점. 분당노인복지관 실버미디어 동아리 ‘포토펠리스’ 회원들이 지난 1년간 공을 들여 만든 첫 영화의 데뷔 식이었던 것.
이날 상영된 두 편의 영화는 아마추어 노인들이 만든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영상과 디테일한 심리묘사로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고령의 나이에도 영화 작업에 현장 기록을 담당한 이창림(83)씨는 “그동안 영화는 스토리 위주로 봐왔는데 장면 하나하나 얼마나 공이 들어가는지 알게 됐다”며 “한 컷 당 평균 10회 이상의 NG가 날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고 회상했다.
‘어떤 하루’의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주인공 역을 맡은 조석종(76)씨도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아마추어 노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하고 간추리는 작업이 어려웠다”며 생애 첫 영화데뷔의 소감을 밝혔다.
그런가하면 먹을 것 앞에서 무너지는 역할에 제격이라는 권유에 ‘못 참아’의 주인공 역을 수락하게 됐다는 정계옥(67)씨.
“이왕이면 이쁘게 나오고 싶은데 입가에 침 묻혀가며 사실적으로 나오니 조금 민망했지요. 하지만 우리 회원들 첫 작품으로 만든 건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게 돼 기뻐요.”




노인영화제에 출품해 기량 선보이고 싶어



어떤 하루의 주인공 삼식이의 삶을 통해 회원들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노인세대의 소외와 외로움. 가부장적 삶의 전형이었던 나삼식이 암 선고를 받고 벌어진 어느 하루의 묘사는 반전이 주는 충격만큼이나 세밀한 일상의 묘사가 뛰어났다.

“시나리오를 쓴 조석종씨네 집을 빌려 촬영했고 집안 살림도구도 그대로 나오지요. 소품담당은 곰국을 끊여 가져오고, 주요 소품인 보청기는 회원이 쓰던 거를 빌린 겁니다. 우리 주변의 일상을 그대로 활용했으니 현실감이 살아 있었겠죠.”
소품을 담당한 조원자(76)씨의 발언에 회원들 모두가 공감한다. 무엇보다 공을 들인 건 노인들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는 전달하는 과정. 짧은 단편 안에 디테일한 심리를 전달하기 위해 시나리오 수정과 축소를 거듭하면서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이중 어려움을 겪었다고.
“사실 우리 모두 평소에 사진에 관심이 많고 복지관에서 DSLR 사진을 배우면서도 영화작업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죠. 성남문화재단의 지원이 있어 뛰어들긴 했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시나리오 작성부터 콘티제작 등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일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어찌어찌 만들어 놓고 나니 뿌듯함이 있어요. 올해엔 노인영화제에도 출품해 볼 생각입니다.” 촬영과 음향을 담당한 임성빈(68)씨의 포부다.




영화라는 새로운 도전이 주는 행복감
노인세대들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지만 영화라는 공동 작업을 하면서 오히려 완고한 노인들끼리 의견조율과 화해의 방법을 배우는 기회였다는 양동훈(68)씨. 카메라와 녹음을 담당한 그에게 삼식이의 현재 위상을 물었다.
“삼식이도 옛말이에요. 요즘은 노인들이 더 바빠. 집에서 한 끼 찾아 먹기도 어려워요. 노인세대들이 많이 변하고 있어요. 젊은 세대 보다 더 바쁘고 활기차게 살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우울하고 소외된 노인문제보다 건전하고 활기찬 노년의 인생도 조명해 보고 싶습니다.”
영화를 통해 스스로에게 내재된 열정을 깨닫게 되었다는 6명의 포토팰리스 회원들.
아직도 배워야 할 세상 공부가 많다며 넉넉한 미소를 보이는 회원들이 앞으로 만들어낼 영화는 또 어떤 모습일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권미영 리포터 myk3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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