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즐거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서울대에 수석 입학한 누군가는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까지 냈지만 이를 공감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하는 걸 무엇보다 즐기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다. 새벽까지 공부하는 모습에 아이들은 아버지 직업을 ‘교사’로 알았고, 아내는 ‘이혼’이라는 마지막 카드로 협박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 바로 송파구청 민원여권과 조규호(59) 가족관계팀장 이야기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 ‘호적박사’라 불리고 있는 그는 만났다.
끝이 없는 공부, 도움 줄 수 있어 행복
조규호 팀장은 고시를 준비하다 공무원이 됐다. 그의 첫 발령지는 마천동사무소. 호적업무를 시작하게 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업무를 보던 어느 날, 젊은 여성이 찾아와 출생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그 출생신고서 부(父)란이 비어있었다. 기재를 요청하자 “아버지 없는데요”라는 말이 돌아왔고 조 팀장의 입에선 바로 “아니, 아버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순간 당황한 민원인은 “공부 좀 하고 업무보시죠”라는 말을 남기고 동사무소를 떠났다.
“알고 보니 혼인외 출생자는 아버지 성명을 기재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 하더군요. 제 무지함이 그 분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맡은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게 정말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공부가 시작됐다. 호적과 관련된 법공부는 너무나 방대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후 5시간을 채 자지 않는 공부가 이어졌다.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는 남편을 보며 하루는 그의 아내가 선전포고를 했다. “12시 넘어 공부하면 이혼하겠다”고. 2~3일 아내의 마음을 맞춰준 뒤, 집에서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가 선택한 곳은 엘리베이터 앞. 복도식 아파트라 엘리베이터 앞에는 다른 곳보다 밝은 조명이 있다는 걸 이용했다. 앉은뱅이책상을 구입한 그는 아내가 잠들면 조용히 그곳으로 가 공부를 시작했다. 밤늦게 귀가하는 주민들이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공부할 수 있다는 자체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조 팀장 스스로도 “호적에 미쳤다”고 말할 만큼 빠져들어,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관련법조문을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를 방문한 한 부부를 만났다. 그런데 아이의 엄마가 호적이 없는 무적자(無籍者)였다. ‘아니 요즘 세상에 호적이 없는 사람이 있나’는 생각이 들어 놀랍기도 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도왔다. 성본창설허가를 받게 도와주고 호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의 출생신고도 무사히 할 수 있었다.
호적계의 달인으로 인정받다
91년 송파구청으로 옮겨온 그는 94년부터 현재까지 호적계(2008년 가족관계등록팀으로 변경)에서 일하고 있다. 호적계에서의 그는 한 마디로 ‘물 만난 물고기’이다. 민원인이 가족관계등록을 문의해오면 곧바로 그의 머릿속엔 관련법규와 규칙, 예규, 선례가 쭉 떠오르고 관련조문과 주의 핵심사항까지 거침이 없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가족관계등록 법규가 워낙 방대해 법원에까지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 민원인이 법원에 가 민원서비스를 신청해도 양식만 줄 뿐 구체적인 기재나 안내는 불가해 고충을 겪는 일이 많고, 법무사나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시 경제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 팀장을 찾아온 사람들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 팀장이 사건의 흐름이나 처리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다양한 양식을 제공, ‘홀로 소송’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송파구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호적에 대한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제가 공부한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죠. 저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문서들이잖아요.”
2002년 한 해만 빼고 줄곧 가족관계등록팀에서 일하고 있는 조 팀장. 그의 열정과 실력은 구청은 물론 나라에서도 인정했다. 서울시 교육원 직원교육과 서울시 다산콜센터 상담원 교육, 국민고충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대법원장 표창을 수상했다.
모은 책만 2만 여권, 국제 사례집 발간할 예정
그는 이제까지의 모든 자료를 모아두었다. 그의 책상에는 더 이상의 책을 꽂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그가 직접 만든 1만 페이지에 달하는 호적법규자료집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보물이다. 또 세계 각국의 호적사례을 수집하고 정리한 자료도 20여권에 달한다.
요즘도 시간이 날 때면 전국의 서점과 헌 책방을 돌며 호적관련 고서와 법규집을 구입한다. 그래서 모은 호적 관련 서적만 1000여권. 책을 유달리 좋아하는 그의 집에는 2만 여권에 달하는 책이 있다. 책 때문에 침대를 놓을 공간이 없어 “침대에서 자지 못한 딸들에게 미안하다”는 조 팀장. 그는 세계 각국의 호적 사례집을 정리해 ‘국제사건사례집’을 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조 팀장에게 정년 후의 계획을 물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가정법률상담소, 국민권익위원회, 구청 등에서 꾸준히 봉사활동을 할 계획입니다. 또 이제까지의 업무와 관련된 일을 계속 하게 되겠죠. 무엇보다 법률서비스에 제한이 있는 취약계층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박지윤 리포터 dddo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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