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의사’와 간호사, 그린닥터스 회원들이 일군 10년 인간사랑
정근 이사장 “지역 봉사단체에서 국제 구호단체로 발돋움”
의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각은 다면적이다. 돈 잘 버는 전문직 종사자로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사회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자기 가족과 의사집단의 이익에만 충실한 이기주의자로 경원시하기도 한다. 의사에 대한 이러한 야누스적인 시각은 보통 시민들이 결코 편하게 접근하기가 힘들게 하면서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특수집단의 사람들로 여기게 한다.
‘청진기를 든 외교관’은 이러한 우리들의 의사에 대한 시선이 매우 틀에 박힌 것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진료실에 앉아 환자를 진찰하면서 하루 종일 병원을 떠나지 않는 의사,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병의원의 경영에만 관심을 쏟는 의사, 주위의 아픔과 슬픔은 외면하면서 나와 내 가족의 안위와 평화에만 신경을 쓰는 의사의 모습과는 전혀 딴 모습의 의사를 만나게 된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구 단위 지역의 보건의료에서부터 시작해 눈을 점차 넓혀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극빈국가와 재난지역, 분쟁지역으로 의료봉사영역을 확장해가는 과정은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과 인도주의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새삼 알게 한다. 더구나 그의 발길이 분단된 한반도의 반쪽인 북쪽으로 이어져 개성병원을 운영하면서 평화와 화해의 주춧돌을 놓는 과정을 따라가노라면 통일시대를 앞당기는 첨병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이 책은 순수 민간 국제구호단체인 그린닥터스를 창립한 정근 이사장이 국가와 이념, 종교를 떠나 지난 10여 년 간 국내외에서 펼친 의료봉사와 국제구호활동 중에 자신의 생각과 작성했던 글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다. 발간사에서 정근 이사장이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바보의사’ 성산 장기려 박사의 정신과 인류애를 이어받은 수많은 부산의 후배 ‘바보의사’들이 만들어낸 기적의 기록이자 국내외 3만 여 명의 그린닥터스 회원들이 펼친 의료봉사활동의 족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책은 1997년 IMF이후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이웃들을 위해 정근 이사장을 비롯한 몇몇 의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백양의료봉사단’을 만들어 부산진구를 중심으로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책은 크게 2부로 나뉜다. 1부 ‘그린닥터스’에서는 국제구호단체인 그린닥터스를 창립하게 된 과정과 개성의 남북협력병원인 개성병원을 열고 7년째 운영하면서 통일의 불씨를 키워가고 있는 활동상이 소개된다. 2부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는 스리랑카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미얀마 중국 등 지진과 쓰나미 등 자연재해와 질병에 고통받은 재난지역에 긴급구호팀을 파견해 인술을 펼치는 숨가쁜 현장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책의 대부분은 정근 이사장이 썼지만 긴급구호활동에 참가한 의사와 간호사, 자원봉사자들의 참가기도 상당량 들어있어 재난지역 구호활동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1. 부산에서 태동한 국제구호단체 그린닥터스
전 세계는 물론 북한에서도 의료봉사활동을 펴고 있는 국제구호단체 그린닥터스가 부산에서 결성됐다는 사실을 아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책에는 작은 모래알이 모여 돌멩이가 되고 바위가 되듯 부산의 작은 지역의료봉사단체가 국제구호단체로 성장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소개돼 있다.
IMF이후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는 백양로교회에 다니는 부산대 의과대학 출신 의료인들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기 위해 백양의료봉사단을 결성한다. 이웃의 아픔부터 보듬자는 의료인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것이다.
“매년 5월5일이나 석탄절이 되면 백양로교회에는 전문의 30명을 포함하여 간호사 기사 등 의료진만 50여명을 거느리는 대형 종합병원이 들어선다. 교회는 이날 지역주민들한테 모든 시설을 개방한다. 그날 진료를 받은 사람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수술이 필요한데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각 회원들의 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받도록 해준다. 계속적인 진료가 필요한 사람은 그날 진료한 의사 회원의 병원에 가서 1년간 무료 진료혜택을 베풀었다. IMF 이후 지난 10년 동안 누구도 보살펴주지 않았던 영세민 환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것이 백양의료봉사단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 데, 이는 내게 좀 과분한 칭찬이다.”-책 속에서
백양의료봉사단은 이후 중국 연변과 왕청지역을 중심으로 해외 의료봉사, 외국인 근로자 무료진료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의료봉사단원들은 비록 공인받은 외교관은 아니지만 의료봉사를 통한 민간 외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으로 헌신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백양의료봉사단이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결성됐지만 불교 이슬람 등 종교를 가리지 않고 의료혜택을 베풀었고, 봉사 지역 역시 이념과 국경을 초월해 달려감으로써 인도애와 봉사정신을 구현해나갔다.
IMF 시절 지역주민의 건강과 해외의료봉사활동, 외국인진료를 해온 백양의료봉사단과 부산 서면와이즈멘, 부산YMCA 등의 노력과 의지가 합쳐져 그린닥터스가 탄생한다.
“그린닥터스는 부산시민들의 사랑에 힘입어 짧은 시간 안에 국제적인 의료봉사단체로서 초고속 성장을 했다. 부산사람들의 애정과 해외각지의 부산출신들이 중심이 되어서 조직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부산에 본부를 두고 있는 몇 안 되는 세계적인 조직이다.”-책 속에서
그린닥터스는 현재 서울 울산 대구 경기 경남 등 전국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미국 뉴욕과 미주리, 캐나다, 아프리카, 러시아 등 18개 해외지부도 두고 있다. 중국에는 그린닥터스 차이나가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북경, 상해, 우루무치, 카자흐스탄 등 곳곳에서 진료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린닥터스 해외지부는 한국선교사들과 현지 나라의 의사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린닥터스는 현재 쓰나미, 지진 등 재난지역 구호활동과 해외 의료봉사, 북한개성병원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국경없는 의사회’보다 더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국제의료전문봉사기관으로 성장했다. 앞으로 UN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2. 통일앰뷸런스 ‘개성 남북협력병원’ 출동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한을 연결하던 거의 모든 통로는 닫혔다. 판문점을 통한 정부간, 군사당국자간 채널은 막혀있고, 금강산관광지구는 북한이 현대아산의 재산을 동결한데 이어 직원들까지 철수시킴에 따라 냉전시대와 같은 동토의 땅으로 변했다. 유일하게 남북을 잇는 숨구멍은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이다.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2011년 6월 현재 개성공단에는 123개 회사에 북측근로자 4만7630명, 남측근로자 791명이 근무하고 있다. 2005년 개성공단이 가동될 당시 북측근로자가 6013명에 불과했으나 그동안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금강산 관광객 피격 등의 군사적 긴장과 남북간 갈등속에서도 개성공단 근로인력은 매년 꾸준히 증가세를 보여 오고 있다.
숨 막히는 남북한 간 긴장 속에서도 호흡을 연명해주는 숨구멍 역할을 하는 개성공단, 그 한 가운데에 그린닥터스가 운영하는 남북협력병원인 개성병원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개성병원은 개성공단 초입의 자그마한 단층 건물에 자리잡고 비바람과 폭풍우가 치는 남북관계 속에서도 지난 7년간 평화와 통일의 인술을 펴오고 있다.
2005년 1월부터 진료에 들어간 개성병원은 분단이후 처음으로 2006년 말부터 남과 북의 의사들이 한 건물에서 공동으로 진료하는 남북협력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120평 규모의 병원에는 남북한 의사 10명, 간호사 9명과 앰뷸런스 기사 등 모두 23명이 한 가족처럼 생활하며 5만 명에 가까운 개성공단 근로자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매일 남측환자 30명, 북측환자 150명가량이 병원을 찾으며, 개원이후 지금까지 30만 명의 남과 북의 환자가 혜택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개성병원이 동포애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성심성의껏 북측 환자들을 진료하고 수준높은 의학지식을 전수하는 통로가 되고 있는데 대해 북한은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개성병원이 앞으로 통일시대를 대비하고 남북간 의료격차를 해소하는데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개성병원을 개설하는 과정에서 직접협상에 나선 정근 이사장이 북측의 고위관계자들과 맺은 인적 네트워크와 협상성과 등은 향후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시대를 대비하는데 큰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린닥터스가 개성에서 이룬 성과를 반추해볼 때 의료라는 비정치적, 인도적, 비종교적 부문의 특수성은 남북관계 개선과 화해를 이루는데 앞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대목이다.
3.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
‘청진기를 든 외교관’에는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세계의 오지와 재난지역에서 벌인 그린닥터스의 숨가쁜 구호활동이 생생하게 소개되고 있다.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통상로였던 실크로드를 따라 그린닥터스와 대한의사협회가 힘을 합쳐 의료봉사를 펼친 ‘실크로드 의료대장정’은 상하이, 우루무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인도네시아까지 23일간 6개 팀이 참여하는 릴레이 대장정이었다.
‘신이 버린 땅’ 파키스탄. 2005년 10월 12일 규모 7.6의 강진이 몰아쳐 7만여 명의 사망자와 10만 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아비규환의 현장에도 부산의 민간구호단체인 그린닥터스 의료진은 8명은 투입됐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현장처럼 처참한 재난지역에서 벌이는 그린닥터스의 의료봉사는 그 자체로도 전쟁같다.
스리랑카를 덮친 쓰나미의 현장과 사이클론이 할퀸 미얀마, 15억 중국인이 눈물을 흘린 쓰촨 대지진 현장에도 어김없이 그린닥터스는 달려갔다. 재난현장에서 그린닥터스 긴급구호의료진은 목숨을 내맡겨야 할 만큼 위험한 순간들을 마주하면서 진료를 해야 했다.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독자들은 그린닥터스가 이룬 성과와 뜨거운 인류애, 동포애를 함께 느낄 것을 기대해 본다.
차염진 기자 yjcha@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