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곳에 작업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사동 의류상가 건물의 이층, 아무런 간판도 없고 빈 가게처럼 보이는데, 안이 보이지 않는 유리문을 밀면 잠겨있을 것 같았던 문이 열린다. 그림이 벽에 걸려있는 갤러리 같은 곳, 교실 두 개쯤 될 듯 넓은 이 공간이 박경숙 화가의 작업실이다.
#취재하던 날, 화가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전시회를 앞두고 작품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상사화를 소재로 날아오르는 새를 표현해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작품이었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세계미술교류협회 창립 30주년기념 자연·인간 전(8월 18~25일)에 출품하는 작품이란다. 원로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회라 무척 의미가 크다고 했다.
박 씨는 주로 판화 작품을 한다. 판화는 직접 그리는 그림과는 과정이 사뭇 다르다. 결과는 평면이지만 찍기 전에 입체적인 판을 제작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판은 사용되는 색의 수에 따라 여러 개를 만들고 하나하나 색을 칠하고 찍어서 작품을 완성한다.
“판화는 미리 계산해서 작업을 해도 결과가 예상과 달리 나올 때가 많아요. 찍어서 표현하는 간접성이나 물감의 양에 따라 직접 그리는 방식에서 얻을 수 없는 독특한 화질 효과가 나타나는데 그런 점이 좋아서 판화를 하고 있어요.”
#그가 판화를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 중학교 미술교사였던 시절, 교사연수회에 갔다가 당시 서울대 미대학장이던 고 하동철 교수로부터 판화수업을 들으면서 판화라는 장르에 매료됐다. 2002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연 첫 개인전 이후 국내외에서 10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에 수십 차례 참가했다.
그의 작업의 원동력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의해 축적된 이미지다. 초기 작품들은 어두운 톤의 색깔에 도자기 천 같은 모티브를 이용한 작업으로 한국적인 질감이 물씬 느껴진다. 다도의 세계, 청정한 정신 등 상징의 세계에 마음을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란다. 이후에도 단순하고 절제된 색과 형태를 이용해 정지된 시공간 속에 그리움이 담긴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지난해부터는 화가의 작품세계가 확 달라진다.
“작가들은 작품을 하려고 할 때 어떤 콘셉트로 작업을 할 것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큰 일이거든요. 앞으로 당분간은 ‘아리랑’을 타이틀로 하면서 부제로 죽음과 삶, 부활, 사랑, 이별 이런 것들을 작업할 것 같아요. ”
#작품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재작년 고 노무현대통령 노제에서 만장기를 본 것이 계기가 됐다. 오색의 만장기가 흔들릴 때 화가는 죽음의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느꼈다고 한다. 경이로움에 만장기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그때 찍은 사진을 작품으로 만들어 지난해 ‘아리랑’이란 제목으로 전시했다.
“만장기를 보는데 어찌나 아름답던지 죽음이 죽음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죽음이 삶과 연결된다는 걸 느꼈죠. 그런데 그해 9월엔 함평 상사화축제에 갔다가 산 가득한 붉게 핀 상사화를 보고 또 죽음과 삶을 동시에 떠올렸어요.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서로 그리워한다고 상사화라 한다잖아요. 그때 만장과 상사화의 이미지가 연결되면서 죽음과 삶, 부활을 나타내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화가는 12년간 중학교 교사생활을 거쳐 8년간 한양대와 안산공대에서 강의를 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집안일과 직장생활에 바쁜 와중에도 해마다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에 참가했다.
“작품을 하려고 해도 늘 현실이 발목을 잡았어요. 김치도 담가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아들 숙제도 도와줘야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바로 그때 작품에 몰입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림만이 나를 살게 했고,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줬어요.”
그는 나이 오십이 되면서 자신이 달라진 것 같다고 했다. 실제 자신이 아니라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변화를 발견했다는 거다.
“요즘은 그림을 통해 내가 행복한가보다, 하는 생각을 해요. 그림이 밝아지고 활기가 생겼거든요. 예전에는 성취목표가 너무 강해서 열심히 하면서도 괴로워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자아를 조금 내려놓았다고 할까. 최선을 다하되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자는 마음으로 사니, 삶도 그림도 더 편안하고 활기차진 느낌이에요. 마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랄까요.”
박순태 리포터 atasi2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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