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공신을 찾아서 - 기현수(서현고등학교 3학년)
중위권이던 내가 6월 모의고사에서 2개 틀렸어요
내신 평균 1.4등급에 언·수·외 1등급. 서현고 3학년 기현수 양의 성적이다.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성적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성적은 수많은 질풍노도의 산물. 중학교 이후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올라주지 않는 성적에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 시험에 대한 공포 때문에 시험 때마다 땀으로 시험지를 적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과서가 낡아 찢어질 만큼 공부에 매달렸다는 기 양.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힌 덕분에 지금의 성적을 만들 수 있었다고 기 양은 말한다.
초등때 우등생이었지만 중등때는 중위권으로 전락
기 양은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때까지 반장을 도맡아 할 만큼 학교에서 존재감 있는 학생이었다. 조용하면서도 야무진 성격이 친구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던 것.
“초등학교 때는 공부도 잘했어요. 공부가 어렵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했어요. 다른 친구들처럼 선행학습을 하지 않았어도 늘 우등생이었죠. 좋아하는 플루트를 마음껏 즐기며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행복한 초등학생이었답니다.”
기 양이 성적 때문에 처음 좌절을 겪은 것은 중학교에 진학하고부터다. 중학교 첫 시험에서 평균 70점대로 전교 100등대를 기록한 것. 기 양이 다녔던 내정중학교는 매년 50~70여 명을 특목고에 진학시킬 만큼 실력이 쟁쟁한 학생들이 많았다.
“정말 창피했어요. 70점은 난생 처음 받아보는 성적이었어요.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경쟁도 치열했어요.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한 반에 30명 정도가 외고를 준비했으니까요.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입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올라주지 않는 성적 때문에 자존감도 많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어요.”
난공불락 수학, 수동적인 학습으로 일관한 것이 문제
기 양이 정말이지 극복하기 어려웠던 과목은 바로 수학. 이를 악물고 공부에 몰입한 결과 다른 과목들은 90점대로 상위권에 진입했지만 수학 성적은 70점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당시에 저는 확실히 수학에 발목이 잡혀있었어요. 수학이 평균성적을 심각하게 깎아먹었거든요. 시험을 앞두고 문제집은 6~7권을 풀어도 성적은 여전히 똑같았어요. 수학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고, 급기야 시험 볼 때 너무 긴장한 탓에 시험지가 다 젖을 만큼 손에 땀이 흥건했으니까요.”
하지만 시험 때 틀린 문제들은 맨 정신으로 보면 다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수학에 대한 두려움이 정상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 긴장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완벽한 실력을 쌓는 것 밖에 없다고 기 양은 생각했다.
“스스로의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공부의 양이 적은 것도 아니었어요. 수학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니까요. 공부방법이 잘못되었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해보게 됐죠. 학원에만 열심히 다녔을 뿐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문제였어요.”
기 양은 과감하게 다니던 학원을 끊었다. 수학만큼은 혼자 공부할 수 없는 과목이라고 믿었지만 스스로 길을 찾아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6개월 간의 중국 국제학교 경험…또 다시 공부의 감 놓치다
스스로 공부하면서 수학 성적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고 중학교 3학년 1학기에는 수학 100점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냈다. 수학을 정복하자 기 양은 전교 5~7등의 최상위권으로 급부상했다.
“제가 만족하는 성적이 나오기까지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셈이죠. 정말 난공불락 같았던 수학을 정복하고 나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어요. 누구도 성적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정말 힘들었거든요. 1학년 때 상처받았던 자존심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죠.”
이제 막 공부에 탄력을 받은 기양에게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가 중국에 주재원으로 가게 된 것. 기 양은 중학교 3학년 9월경부터 중국의 국제학교 학생이 되었다.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게 좀 아쉬웠지만 자유롭고 좋았어요. 특히 수학에 해방되어서 좋았죠. 한국에 비해 국제학교의 수학은 정말 쉬워요. 저는 그곳에서 늘 우등생이었고 천재같은 아이로 통했어요. 몇 년 후 특례전형으로 한국대학에 가야겠다는 나름의 진로로드맵도 설정해 놓았죠.”
하지만 상황은 또 한 번 바뀌었다. 6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상황이 된 것. 한국에서의 고교진학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현고에 배정받게 되었다.
“저로선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어요. 고등학교 첫 시험을 봤는데 주요과목 내신 평균 4~5등급이 나왔어요. 다시 중위권이었죠. 다른 친구들이 한참 고교과정 선행학습을 하는 중3 6개월 동안 저는 놀면서 지냈으니 당연한 결과였겠죠.”
나만의 개념서 만들며 학습맵 완성, 전국 최상위권으로 등극
오기가 발동했다. 중위권으로 최상위권으로 뛰어 올랐던 경험을 생각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배운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노트화 하는 고지식한 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려워진 국어는 첫 시험 60점대로 5등급 대였던 성적을 1년 만에 90점대로 1등급으로 올려놓았다.
“책이 닳아서 찢어질 만큼 교과서 지문을 거의 다 외웠어요. 단원, 제목, 주제, 갈래 등을 모두 노트에 적으며 나만의 참고서를 만들어 나갔죠. 문제를 풀면서는 선택지에 나오는 새로운 정보들도 노트에 덧붙여 적었어요. 문학의 원리와 작품의 어떻게 문제로 출제되는지도 꿰뚫게 되더라고요.”
중3때 손을 놓기 시작한 수학도 문제였다. 고1 겨울방학 때부터 수학도 국어와 같은 방법으로 노트에 개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학 문제의 응용력이 떨어지는 것은 개념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정석같은 개념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 다양한 유형의 문제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나만의 노트를 완성해갔죠. 개념만 정리하다보면 실천하고 멀어지게 되거든요.”
수험생은 나무와 숲 모두 보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기 양은 말한다. 부분에 집중하다보면 전체를 놓치기 쉽고 전체에 집중하다보면 부분을 놓치기 쉽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지난 6월 모의고사에서 기 양은 언수외 통합 2개만을 틀렸다. 전국 백분위 99%에 해당되는 성적.
“근본적인 사고력 없이 암기형 공부를 하다보면 수능에서 내신을 잘 받았어도 수능모의고사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받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대학입시는 주요과목의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율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이춘희 리포터 chlee1218@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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