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모든 곳이 길이더라
올봄을 돌아보면 제대로 된 기억이 별로 없다. 목련은 ‘피었나’ 싶더니 빛바랜 체 뒹굴고 벚꽃은 눈부시기는커녕 어느새 듬성듬성 서글픈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맘껏 봐주지 못한 미안함에다 더 늦기 전에 봄을 즐기고픈 조급함이 쌓여갈 때 20년 지기 선배가 여행을 제안한다. 목적지는 강원도 ‘바우길’.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이 내가 되는 여행’을 앞두고 소풍 전날의 아이처럼 마냥 설렜다.
바우길은 강원도 사람을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이름 그대로 강원도를 상징하는 길이다. 제주도에 올레길, 지리산에는 둘레길이 있듯, 강원도의 바우길은 다소 투박하고 거칠지만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길이다. 강릉이 낳은 소설가 이순원(54)과 산악인 이기호(51)씨가 함께 개척한 바우길은 대관령에서 경포와 정동진에 이르는 열 개 구간, 대관령 길 세 개 구간과 주문진 가는 길 등 총 열일곱 개 구간의 200km에 달하는 길로 이뤄져있다. 새로 만든 길이 아니라 오로지 옛 길을 찾아 다시 이은 길이기에 데크 로드도 깔지 않고 이정표도 최소화했다.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걸을 때 그 길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라 한다.
‘선자령 풍차길’을 걷다
여행 첫날, 바우길 1구간인 선자령 풍차길에 올랐다. 1구간이라는 상징성에 유일하게 출발지와 도착점이 같아 차량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게 선택의 이유였다. 출발장소인 대관령 휴게소는 인근에 있는 양떼 목장을 방문하려는 인파로 제법 복잡했다. 그러나 바우길 초입에 들어서니 등산객은 우리일행뿐이라 심심할 정도로 단출해진다.
선자령 풍차길(11km)은 국내최대의 풍력발전단지와 국사당성황당이 있고 목장 길과 야생화 숲길이 있어 아기자기하게 볼거리가 많은 길이다. 오를 때는 하늘과 세상을 보고, 하산 때는 땅과 나를 돌아보는 길. 다양한 수종의 숲길, 그 호젓함이 너무 좋았다. 비가 개이고 해가 나는가 싶더니 목가적인 풍경의 바람개비 아래로 연무가 자욱하다. 밑에서는 느끼지 못한 또 하나의 장관과 자연이 나를 흔드는 이 느낌. 길가에 수줍게 핀 얼레지의 꽃말처럼 ‘바람난 여인’이 된 듯 기분이 좋다.
같은 길로의 하산이 싫어 우회 길을 제안했더니 아이들이 반대한다. 나름 친자연적 여행경험이 많았음에도 ‘마냥 걷는 것’이 도시 아이들에겐 다소 지루했던가. 그래도 언젠가는 ‘우리가 걷는 것이 그냥 자연 속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한가운데임을 깨닫게 될 거라’ 되뇌며 하룻밤 묵기로 한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솔향 가득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룻밤 묵다
강릉시 성산면 대굴령 자동차 마을에는 다섯 채의 깔끔한 숙소동과 식사동, 관리사무실을 갖춘 바우길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관광지인 강릉의 경우 여름 성수기와 가을 향락 철, 연휴기간에는 숙박시설이 부족하고 가격이 비싸다는 점, 그리고 바우길 일부구간에서는 식사할 만한 장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운영하게 되었다고. 게스트하우스라 하기에 처음에는 산장 같은 곳에서 담요 한 장 덮고 자고 취사는 각자 알아서 하는 시스템인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통나무집 형태의 깨끗한 숙소였다.
벽 전체를 소나무로 꾸며 안으로 들어서면 소나무 특유의 향기가 나고 널찍한 공간에 집기일체가 깔끔히 정리돼 있다. 거기에 1인당 2만 원의 후원금으로 저녁과 아침식사까지 제공받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고즈넉한 산자락의 마을을 둘러보고 오니 친절하게도 식사안내 전화까지 해준다. 찬이 별로 없어도 걷기 여행을 마친 터라 두 번씩의 리필은 기본. 묵직한 다리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간만에 곤한 잠속에 빠져들었다.
‘헌화로 산책길’을 가다
둘째 날의 코스 선택은 간단했다. 전날 산행 길에 올랐으니 이날은 바닷길을 걷기로 한 것. 다만 바다로만 이어지면 왠지 무료할 것 같아 가벼운 산길과 마을길을 지나 항구로 이어지는 소탈한 9구간을 걷기로 했다. 출발지인 정동진역으로 가는 길에는 강릉 통일공원과 함정전시관을 지나게 된다. 함정전시관에는 이곳에 침투하다 잡힌 북한 잠수함과 우리의 바다를 누비다 퇴역한 전북함(길이 118m)을 공개하고 있다. 전함의 웅장함은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실감하기 어려운 법. 작전실, 함장실, 취사실, 이발소 등 해군이 실제로 사용하던 공간 곳곳을 둘러볼 수 있어 생생했지만 천안함 사건이 떠오르며 숙연해 지기도 한다.
정동진에서 옥계까지 14km에 이르는 ‘헌화로 산책길’이 9구간 코스다. 신라의 절세미인 수로부인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던 남편을 따라가다 바닷가 천길 벼랑에 곱게 핀 꽃을 보고 따고 싶어 했다. 그때 소를 타고 지나가던 노인이 올라가 꽃을 꺾어 바치며 부른 노래가 ‘헌화가’. 이 향가에서 헌화로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한다. 바우길은 관의 지원이 없다 보니 그 걸음이 더디긴 하지만 민간 후원금으로 만들어가며 자연 훼손이 없어서 더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탄탄하다. 하지만 나뭇가지에 묶인 리본이외엔 별 다른 표식이 없어 길을 잘 살펴가며 걸어야한다. 우리 역시 인적이 없는 산길에서 약초꾼을 만나지 못했다면 바다의 ‘바’자도 못 보고 하루가 저물 뻔한 순간이 있었다.
바우지기가 적극 추천한 ‘시골집’의 망치 매운탕은 철이 아니라는 이유로 먹지 못했지만 대신 가자미 매운탕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구워 먹기만 하던 가자미로 매운탕을 끓인다니 어떤 맛일까 싶은데 국물에 밥을 볶아 남김없이 먹을 정도로 별미. 거기에 토속주인 옥수수 막걸리 한잔을 걸치니 피로쯤 ‘저리가라’다.
심곡부터 금진에 이르는 길은 에메랄드빛 동해바다와 자그마한 항구가 그림처럼 이어진 해안도로. 국내에서 해변과 제일 가까이에 접해있는 길이다. 걷는 도중 철썩이는 파도세례에 흠뻑 젖기도 했지만 물결에 휩쓸려 소리 내는 몽돌의 울음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 행복한 기분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중간에 한 시간여를 헤맨 터라 도착지인 옥계에 못미처 돌아 갈수 밖에 없던 상황. 다섯 시간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는 게 고민이었는데 20분 만에 출발지로 되돌아갈 수 있는 버스가 다니고 있어 간단히 해결 할 수 있었다.
둘째 날 밤은 리얼 야생체험
해가 지기 전에 텐트를 치려고 주문진해수욕장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원래는 오대산 국립공원 야영장이 목적지였으나 공사 중인 관계로 행선지를 변경한 것. 주문진 해수욕장 관리처 문의하니 “야영이 가능하다면 굳이 막지는 않겠다”는 맘 좋은 답변이 돌아온다. ‘하기야 이 계절에 바닷가에서 야영을 하겠다는 게 무모한거지’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어려운 결정에는 적절한 대가와 보상이 따르는 법이던가. 처음 접한 밤바다의 바람은 매서웠지만 대신 넓은 해수욕장은 모두 우리 차지가 되었다. 가건물을 바람막이 삼아 텐트를 치고 보니 황금연휴 북새통에 어디서 이런 호젓함을 맛보랴 싶다. 지칠 줄 모르게 뛰노는 아이들의 싱싱함과 지천에 널려있는 솔방울에 구워먹는 바베큐 맛은 자연이 준 황홀한 덤이었다.
박신영 리포터 jump1042@hanmail.net
[바우길 여행정보]
바우길 게스트 하우스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비교적 이용이 수월하지만 주말에 이용하려면 미리 예약 하는 게 좋다. 5월말까지 1인당 2만원이던 요금은 6월 1일부터 25,000원으로 인상된다. 이용료에는 숙박 외에 아침과 저녁 두 끼의 식사비가 포함돼 있다. 식사를 제공하지만 숙소 내에는 취사시설(그릇만 제외)이 갖춰져 있고 바비큐 이용도 가능하니 참고하면 좋을 듯. 단, 수건과 세면도구 등의 개인용품은 본인이 지참해야 한다.
문의 033-645-0990/ www.baugil.org
[바우길 17개 구간]
▶1구간: 선자령 풍차길(11km 4~5시간 소요) ▶2구간: 대관령 옛길(16km 5~6시간) ▶3구간: 어명을 받은 소나무 길(13km 5~6시간) ▶4구간: 사천 둑방길(17km 6시간) ▶5구간: 강릉바다 호숫길(17km 6시간) ▶6구간: 굴산사 가는 길(18km 9~7시간) ▶7구간: 풍호연가(20km 7시간) ▶8구간: 산 우에 바닷길(9.3km 5시간) ▶9구간: 헌화로 산책길(14km 6시간) ▶10구간: 심스테파노길(11km 5시간) ▶11구간: 신사임당길(16.4km 6시간) ▶12구간: 주문진 가는 길(13.4km 4~5시간) ▶13구간: 향호 바람의 길(14km 5~6시간) ▶대관령 1구간(11.8km 4~5시간) ▶대관령 2구간(13km 5~6시간) ▶대관령 3구간(8.8km 3~4시간) ▶울트라 바우길(3박 4일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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