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병원
의학박사, 수필가
남호탁 원장
“제 치질이 몇 기입니까?”
치질(치핵)로 병원을 찾는 환자들 중 유독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1도 치핵은 똥을 눌 때 피만 날 뿐 별 다른 증상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2도 치핵은 똥을 눌 때 치핵 덩어리가 항문 밖으로 밀려나왔다가는 저절로 들어가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3도 치핵은 항문 밖으로 밀려나온 치핵 덩어리가 저절로 들어가지는 않고 손으로 밀어 넣어야만 들어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4도 치핵은 치핵 덩어리가 항상 항문 밖으로 나와 있으면서 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경우를 일컬어 그렇게 부릅니다.
사실 4도 치핵 환자의 경우 어찌나 통증이 심한지 제대로 걷기도 힘이 듭니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산모의 경우 출산하면서 4도 치핵이 생길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산모의 말을 빌리면 4도 치핵이 아기를 낳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이쯤에서 ‘아하, 그러니까 기수가 올라갈수록 심한 치질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런 추측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아니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3도나 4도 치핵을 가진 환자의 경우, 불편함이나 통증으로 인해 병원을 찾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됩니다. 반면에 배변 시, 그것도 어쩌다 가끔 피가 비칠 경우에는 1도 치핵으로 지레 결론을 내리고는 병원을 찾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1도 치핵으로만 출혈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장암이나 대장암이 있을 경우에도 얼마든지 출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도나 4도 치핵의 경우 병원을 찾지 않기도 어려울뿐더러 병변이 명확하기 때문에 적어도 암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1도 치핵이겠거니 하고 진찰을 미뤘다가 직장암으로 판정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이런 이유로 선입견이 무섭다는 겁니다. 치핵의 경우 1도 치핵이 4도 치핵보다 더 무서울 수 있고 치명적일 수 있음을 유념해야만 하겠습니다. 사소한 병변이 요란스런 병변보다 치명적일 수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 걸 보면 삶이라는 게 오묘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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