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박사, 수필가
예일병원
남호탁 원장
직장암으로 수술 받은 A씨와 Z씨가 있다. Z환자는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침대를 벗어나는 일이 없다. Z환자는 TV나 신문을 보는 일도, 가족과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거의 없다. 침대에 누운 채 “선생님만 믿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반면 A환자는 회진을 가도 좀처럼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 병동 복도를 오가며 운동을 하는 건 기본이고 누워 있을라치면 하다못해 책이라도 읽는다. 병동에서 그와 마주칠 경우 먼저 말을 건네는 이는 의사인 내가 아니라 환자인 그다. A환자는 나를 향해 웃어주고 운동하며 나름대로 바쁠 뿐, 침대에 붙박인 채 의사만 믿네 뭐내 하는 말 따위는 좀처럼 건네질 않는다.
<알라딘의 마술램프>에는 알라딘과 램프 거인 지니가 등장한다. 지니가 맡은 역은 주연인 알라딘이 요구할 때 지체 없이 나타나 알라딘을 돕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소임이 끝나면 소리 없이 램프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만약에 램프 거인 지니가 지 좋을 대로 나타나 알라딘을 돕고 리드해나간다면 얘기가 될까? 아마 삼류 영화관이나 전전하다 잊힐 영화가 될 것임이 자명하다. 제목도 바뀌어야 할 거다. <친절한 지니씨>나 뭐 그런 정도로.
질병으로부터 회복되는 과정을 영화로 만든다면 배역은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질병을 않는 주체나 회복되는 주체가 환자이니만큼 환자가 주연인 것은 당연하다. 조연은? 아내, 남편, 부모, 자식, 애인, 친구, 동료, 의사 등 누가 되었든 그다지 크게 신경 쓸 건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자신이 주인공임을 까마득히 잊은 채 조연인 의사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 Z씨와 같은 환자가 많다는 얘기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의사가 주연이었던 적은 없었다. 의학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히포크라테스조차도 주연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었다. 닥터(doctor)라는 말 역시 ‘시중들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환자가 주연이고 의사가 조연일 때 진정한 회복도 기대할 수 있는 거고 그게 환자와 의사의 올바른 자리매김이다. 알라딘의 주체적인, 능동적인 액션이 없다면 지니는 램프에 갇힌 채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을뿐더러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은가.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