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늘어난 뱃살,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고 걸어가는 모습인가요? 아니면 동화 속 키다리아저씨처럼 든든한 이미지인가요? 얼마 전 한 젊은 배우는 ‘아저씨’라는 영화를 통해 ‘남자 어른을 예사롭게 이르는 말’인 아저씨의 느낌을 바꾸어 놓기도 했습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는 아저씨. 삶의 터전을 지키면서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아저씨. 내일신문은 나의 길을 가며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我저씨들의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사라져가는 우리 지역의 역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나의 일
뿌리 없는 나무가 이 세상에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뿌리인 우리문화,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서양문화를 이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살아온 발자취, 우리 동네 어귀의 오래 된 나무 한 그루가 바로 역사”라는 정동일 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45세). 그는 문화재전문위원이라는 공직자로서 뿐 아니라 주말이면 답사여행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눈에 보이는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우리지역 역사통이다. 문화재전문위원으로 바쁜 일정 속에서 벌써 15년 째 휴일도 반납한 채 학부모와 아이가 함께하는 답사여행을 이어온 것, 쉽지만은 않았을 터. 그래서 늘 궁금했다. 그가 우리 지역 역사에 대해, 또 아이들에게 우리 지역문화를 알리는 일에 왜 그토록 깊은 애정을 갖게 된 것인지.
유년의 놀이장소였던 동네 선조 무덤과 문화재, 자연스럽게 역사학도가 되다
정동일 위원은 10대째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는 고양 토박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원흥동 자락은 경주 정씨 집성촌으로 동네사람들 대다수가 집안 내 어르신이고 친척들이다. 그런 까닭에 문중에 누가 되지 않도록 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머리에 두고 살았다는 정 위원. 동네엔 선조의 무덤이며 유적지, 문화재가 많았고 그곳은 유년기의 좋은 놀이터였다. 또 동네가 한 집안과 다름없으니 족보며 뿌리에 대한 의식이 조금은 남달랐을 터. 그래서였을까.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국사와 사회과목이 다른 과목보다 적성에 맞았고 자연스럽게 대학도 국사학과로 진학했다. 그런 그가 태어난 고향, 고양시 향토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무렵 군 입대 후 휴가를 맞아 집에 다니러왔을 때. 당시 고양시는 일산신도시개발계획이 시작되고 있을 때라 마을 곳곳이 파헤쳐지고 여기저기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휴가를 나올 때마다 있던 길이 없어지고, 마을 어귀 나무들이 뽑혀나가고 논밭이 사라지곤 했어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점차 변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지요. 누군가 기록하고 남기지 않으면 그냥 그곳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영원히 묻히고 말텐데 문화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얼마나 절실한 마음으로 그걸 기록으로 남길까 싶었어요. 애향심이 없으면 발로 뛰면서 기록을 남겨야겠단 생각이 아무래도 덜 하겠지요. 그래서 시간만 나면 사진을 찍어두기 시작했어요.”
제대 후 정 위원은 학교를 휴학하고 1년 여 신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지역의 곳곳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어르신들을 만나 농요며 설화 등을 녹음했다. 그러다 지금의 대화동 성저마을 문화재 발굴 당시 발굴단에 합류, 본격적으로 향토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대 박물관 팀과 본일산, 중산, 화정, 행신 등 사라져가는 고향의 마을의 유래를 찾아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물이 고양문화원과 함께 펴낸 ‘고양군 지명유래집’이다.
고양시문화재대관, 고양시민속대관...가족의 희생과 아픔도 함께 담긴 소중한 기록들
대학 졸업 후 정 위원은 고양문화원과 고양신문 향토문화연구회에 근무하며 1991년 서울대학교 박물관 팀과 ‘고양군 화정지구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를 펴냈으며 93년~95년 ‘고양시문화재대관’과 ‘고양시민속대관’ ‘고양금석문대관’ 등을 연달아 펴냈다. 말이 쉬워 책 한 권이지, 세월의 덮개가 고스란히 묻은 저서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 지금은 도서관에나 있음직한 대형 백과사전만큼 두껍고 글씨도 깨알 같은 연구서들. 발로 뛰어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밤을 수없이 세워가며 정리한 저서들은 어쩌면 그의 가족들과 함께 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양시문화재대관을 낼 당시 아버님이 감기를 앓으셨어요. 평소 건강하셨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감기가 폐렴이 되고 갑작스럽게 악화되면서 손쓸 사이 없이 돌아가신 아버지, 책 내는 것만 정신을 쏟았던 데다 곧 좋아지시려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죄책감. 그래서 아버지는 정 위원에게 恨이다. 옛날 어르신들의 고정관념으로 공직자가 되어 안정적인 삶을 바라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바람대로 96년 그는 고양시 1호 전문직 공무원 ‘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이 됐다. 하지만 홀어머니와 아내, 세 아이들에게 아직도 많은 시간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하다는 정 위원.
“내가 아내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런데 뭐 내세울 것 없으니 쉽게 결혼이 될 리 없지요.” 아내가 마음을 열게 된 것은 답사여행을 진행하던 정 위원의 강의를 들으면서. 아이들 누구도 한 눈 팔지 않고 강의에 집중하도록 하는 열강에 “자기 일에 열정적인 믿음직한 사람”으로 낙점을 받았다고 웃는다. 프로포즈 장소도 문화재급(?)이다. 용미리 마애불 앞에서 했다니 말이다.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사랑하게 되고, 사랑을 해야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겨
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으로서 그의 역할은 사라져 가는 고양시의 문화유적을 보존하고,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고향 고양시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되도록 많은 자료들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라는 정 위원. 그래서 곧 개발될 동네를 찾아다니며 지역 어르신을 만나고 농요며 유물들을 기록하고 남기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연구도 좋지만 연구를 위한 토대는 기록이지요. 기록은 발로 뛰어다니면서 어르신들을 만나고 사진을 찍어 남겨야 하는데 애향심이 없으면 안타까울 것도 절실할 것도 없지 않겠어요. 저는 돌아다니면 아, 자네 누구 아들이지 하면서 어르신들이 기억도 더 되짚어 내주시려 애쓰고 귀한 농기구며 유물들을 간직하라고 주십니다. 그러니 이 일이 제가 꼭 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 노력 덕분에 고양시문화재, 역사에 관한 한 그를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책상 신도시가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곳이 어떤 동네였는지 마을이름 하나에도 유래를 살리고 역사를 담아내 지으려 애쓴다는 정 위원.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하는 것 못지않게 그가 강조하는 것은 ‘역사교육’. 매주말 학부모와 함께하는 답사여행은 공직자의 신분을 벗어나 사명감 하나로 진행한다. “책상에 앉아 왕조나 제도, 인물을 달달 외우는 것은 중요치 않다”는 그는 “눈에 보이는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도시의 특성상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온 경우가 많아 지역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부족한 것이 사실. “사랑의 시작은 상대방을 아는 것부터 시작하잖아요. 사랑을 해야 머물고 싶고요.” 반가운 것은 그의 답사여행은 순번을 기다릴 정도로 인기 만점. 그가 정한 원칙을 따라야 하는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엄마들은 한번 다녀오면 정 위원의 열렬한 팬이 된단다. 그것은 고향을 사랑하는 그의 진정성이 엄마와 아이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또 있다. 우리들 몇이나 알까? 정 위원이 지난 2008년 강북구청과 북한산이 일제의 잔재라며 ‘삼각산’으로 개명하자는 논쟁에서 끈질기게 논리적인 반론을 펼쳐 ‘북한산’이란 이름을 지켜낸 것 사실을. 그는 그런 사람이다. 고양시에 사는 우리들을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만드는, 우리들의 자부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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