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잃은 것은 하나, 대신 수없이 많은 기쁨을 얻었다
몇해 전 ‘어둠 속의 대화’라는 체험 전시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빛이 완벽히 차단된 어둠 속에서 시각 장애인의 삶을 체험해 보는 프로그램이다. 낯설고 두려운 첫출발을 시작해 체험전시를 끝내고 나올 때까지,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만난 빛을 보며 그동안 한 번도 생각 못했던 나의 건강한 두 눈에 대해 감사했다. 또한 평범하고 지루했던 내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건조한 일상을 반복하며 그 때 그 마음이 희미해 질 무렵 그를 만났다. 1급 시각장애인이자 파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을 이끌어 가고 있는 유석영 관장이다. 그와의 짧은 만남은, ‘어둠 속의 대화’ 보다 더 강렬했다. 그의 삶은 체험이 아닌 현실이었고, 짧은 체험이 아닌 시각장애인으로서 살아온 지난 50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관장님의 지나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시지요.
어릴 적 눈이 점점 나빠지더니 초등학교 때는 아예 칠판글씨를 못보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서울에 유명한 안과에 데려가셨지요. 그 때 병원에서 이 아이는 앞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니 맹아학교에 보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장애인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일반 아이들과 함께 사회 속에서 크도록 하셨지요. 불편했지만 견딜만했고, 공부도 곧잘 했습니다.
나름 꿈도 키웠습니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는데 그 직업은 시각장애인이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방송을 듣게 됐는데, 한 아나운서가 늦잠을 자서 집에 안경을 두고 출근 했고, 그날은 모니터 속의 방송 멘트가 보이지 않아 방송을 할 수 없었다는 에피소드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무심코 웃으며 들었겠지만 전 그 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지요. 제 꿈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평생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구나 하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그때가 중학생이었는데 그 이후 10년 동안 방황을 했습니다. 자살을 할까하는 생각도 여러 번했고, 나중엔 노숙자 생활도 했습니다. 서울역 영등포역 부산역 등에서 노숙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밥을 먹고 다녔지요.
하루는 영등포역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어떤 노숙자가 제게 와서 구걸을 하더군요. 그에게 돈을 주지 못하니 제게 심한 욕을 하고 가버렸습니다. 그 때 ‘세상 가장 밑바닥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할 정도니 내 인생은 뭔가’ 하는 심한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전봇대를 붙잡고 한시간 넘게 눈물을 흘렸지요.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잃은 것은 단 하나이고, 아직 나에게는 수많은 기능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이 남아있구나. 그 때부터 마음을 바꾸고 살게 됐습니다. 재활훈련을 받고 공부도 시작했지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방송생활도 오랫동안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활훈련을 마치고 ‘사랑의 등대’라는 단체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CBS 방송국에서 저희 봉사단체를 취재하고 싶다고 섭외가 들어왔지요. 마침 제가 방송국에 가서 저희 단체를 소개했습니다. 그 때 담당 PD께서 어떻게 방송멘트도 없이 방송을 잘하냐면서 방송리포터로 일해 볼 것을 권했습니다.
어릴 적 아나운서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 시각장애인들은 청각적 감각이 뛰어난 편이라 방송에서 제 역할을 잘 해냈지요. 장애인들의 삶과 현실을 다룬 르포 취재와 88올림픽 때는 장애인 올림픽 특별취재단으로도 활동했지요. 그렇게 11년 동안 방송활동을 한 경험들이 지금 제가 하는 일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꿈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드리고 싶네요.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이지만 그 꿈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 순간 그림처럼 이뤄지는 시간이 오더군요. 어릴 적 너무나 되고 싶었던 아나운서의 꿈을 저는 이렇게 이뤘답니다.
2006년부터 파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으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장애인 복지를 위해 그간 어떤 일들을 해오셨는지요.
외롭고 소외받은 장애인들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기계적으로 일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처럼 서로 보듬고 사는 공동체 사업을 벌였지요. 또한 장애인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함께 그려보는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미술잔치를 3년째 벌이고 있습니다.
최근엔 농촌장애인을 위한 복지프로그램에 주력하고 있는데 농촌장애인들은 도시 장애인과 달리 더 힘겨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중적 차별을 받고 있는 그들을 위해 ‘자기 지역 장애인은 지역에서 돕고 책임지자’는 취지의 파주시 조례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도 진행해 오고 있는데 이는 경기도에서 유일한 청각장애인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구두 만드는 풍경’이 탄생하게 됐지요. 저희 복지관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운전교육, 꽃꽂이, 가족문화 기행, 청각장애 부모를 둔 자녀들의 학습 멘토링까지 많은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했지요. 그런데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밥’을 책임져 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청각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노점상이나 호떡장사 정도라 대부분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일자리만큼 소중한 것이 없었지요.
‘구두 만드는 풍경’에 대해 더 상세히 이야기 해주시지요.
청각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찾던 중 예전 방송활동을 하며 취재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20년 전엔 청각장애인들이 유명 제화 브랜드에서 구두를 만들며 일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청각장애인들에게 그런 구두공장을 만들면 열심히 일하겠느냐 물었더니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구두공장을 차리기 위해 팔방으로 뛰어다녔지요. 그러나 주변의 지인들이 모두 만류하고 나섰지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1%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도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한국 장애인 개발원의 지원을 받아 공장 문을 열었답니다. 38년간 구두를 만들던 장인도 모셔왔지요. 그의 기술과 청각 장애인의 열정으로 명품 수제화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정말 잘 만들고 제 값 받고 팔자는 마음으로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고 1주년 기념행사를 지난 주 서울역에서 진행했답니다.
1년을 돌아보니 약간의 부채는 남았지만 그래도 부도는 나지 않았네요. 대신 브랜드 이미지는 높아졌습니다. 국회의원들과 유명하신 분들이 신고서 ‘참 편한 구두다’라는 평가를 해주신 덕분에 명품수제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엔 백화점에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답니다. 물론 아직까지 공장 경영이나 직원 교육 등 해결할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걱정 속에서도 설레는 희망을 보며 ‘구두 만드는 풍경’을 키워가려합니다. 그 곳에서 일하는 청각 장애인들이 자기가 번 돈으로 가정을 꾸리고, 나라에 세금도 내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농촌 장애인 자립에 선두주자로, 그들을 성공적으로 자립시키는 것이 복지관장으로서 주력하고 싶은 일입니다. 또한 사회복지 현장의 인재를 키워내고 싶습니다. 요즘 사회복지사들은 학력도 높고 지식적으로 풍부한데, 이웃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진정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랑으로 일하고 성과보다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후배들을 일궈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가슴속에 알알이 박힌 나의 이야기를 한권의 책으로 담아내고 싶습니다. 제 삶의 한가지 불편 덕분에 저는 너무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함을 전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장애가 아닌 프리미엄을 안고 사는 제가 해야 할 소명입니다.
양지연 리포터 yangjiyeon@naver.com
사진 이의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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