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검객 되어 하루를 열어요
자기 이름이 수놓아진 검도복을 입고 직접 이름을 새겨 넣은 죽도를 들고 새벽 6시에 검도장에 모인 주부들. 지금부터 1시간은 오롯이 ‘나’로서 설 수 있는 시간.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나’. 비로소 ‘나’는 우주의 중심이 된다.
생각보다 어려운 운동, 검도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발도(뽑아칼)와 납도(꽂아칼)를 익히는 풍동맘들. 밀어걷기와 이어걷기 등 검도의 발동작 하나도 어디 하나 쉬운 게 없다. 텔레비전에서 검도하는 장면이 나오면 흔히들 멋있다고 생각해 아무나 대충 배워도 폼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 초보 시절엔 손발 맞추기와 검이 맞는 위치, 하물며 기합 소리마저도 딱딱 맞추지 못해 애를 먹기 일쑤다. 그래서 초기에 힘들고 재미없으니까 그만 두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그러나 검도는 지속적인 수련으로 자신을 다스리며 하나의 인격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듯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손발, 검, 기합 삼박자가 딱딱 맞는 그날이 온다고 풍동맘들은 입을 모은다.
여명의 시간에 땀을 흘리며 자아를 찾아가는 풍동맘들은 그래서일까? 다들 표정이 밝고 자신감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존감이 충만해 보였다.
검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하다
대학 동아리에서 검도를 배웠던 김소형(43)씨. 졸업 후에는 그나마 동네 검도장에 간간이 다녔지만 결혼 후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검도장과 멀리하다 얼마 전부터 다시 검도장을 찾게 되었다.
묵혀두었던 호구를 꺼내어 햇볕에 잘 말리고 도복과 죽도는 다시 마련하고 마음을 다잡았는데 아무래도 주부다보니 하루 중 시간을 따로 내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새벽에 시작하게 되었고 마침 동네 인검관 원광연(40) 관장이 주부들에게 무료로 문을 열어줘 강습비 없이 검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소식들을 소형씨가 동네 엄마들 카페에 공지하면서 뜻이 맞는 엄마들 몇이 모여 새벽반이 결성되었다.
“검도는 그냥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수련이기 때문에 검도가 좋았어요. 죽도를 놓고 있을 때도 늘 검도를 생각하는 저를 발견하고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평생 검도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지요(웃음). 다행히 동네 도장 관장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뜻이 맞는 엄마들에게 희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어 저로서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동네 맏언니 격인 김소형씨의 말이다. 그는 “검도는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마음과 몸의 기본을 세우게 하는 그런 운동”이라고 말한다.
“제가 누나가 몇 분 계셔서 주부들 사정을 잘 알아요. 남편, 자식 챙기다 보면 정작 본인을 위해선 돈 한 푼 쓰는 것이 아깝잖아요. 그런 마음을 알기에 특별히 주부님들에게는 도장 문을 열어놓기로 했고 그게 벌써 4년이 넘었나봐요.” 어떻게 이런 훌륭한 생각을 하셨냐는 질문에 원광연 관장은 앞으로도 주부들에게 새벽반 문을 활짝 열어놓겠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인다.
“새벽에 나와서 남편과 검도를 하며 하루를 여는데 건강도 건강이지만 정말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을 느껴요.” 남편과 본인, 아들 둘 모두 검도를 하고 있는 이희승(41)씨 가족. 운동이 주는 기본적인 장점뿐 아니라 마음 수련이 되어서 일단 좋고, 온가족이 다 같이 같은 운동을 하니 대화의 양도 많아지고 공통의 화젯거리가 생겨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한다.
“남편과 검도를 하면서 힘든 고비를 함께 넘기다보니 아무래도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저를 이해해주지요. 아들 둘은 저녁에 운동을 하는데 엄마아빠가 같이 하니 힘들어도 포기하는 법 없이 잘 따라주고 있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검도가 가족 운동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이희승씨는 덧붙인다.
검도를 통해 나를 찾고 이웃을 알고 가족을 더 사랑하게 된 풍동 엄마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환하다. 서로를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아이를 가르쳤던 인연 때문에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풍동 주부 검도단원들은 검도뿐 아니라 아이들 책과 아이들 옷을 서로 물려받기도 하고 또 점심 식사 모임을 통해 자매와도 같은 끈끈한 정을 다져가고 있다.
그들은 비록 지금은 몇 명 안 되지만 더 많은 풍동엄마들이 새벽 검도에 동참하기를 희망한다. 주부라는 위치에서 나를 위해 새벽 시간 짬을 내어 조금만 투자한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지 않겠느냐는 소중한 경험에서다. 1시간의 새벽 검도 수련이 끝난 뒤 이마에서 반짝이는 구슬땀을 닦는 그녀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박정은 리포터 mintlady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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