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Life, 느리게 사는 것은 아름답다 ④

지역내일 2010-10-09

느린 교육으로 아이 키우는 사람들

느린 교육 시리즈로 만난 네 명의 부모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내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믿는다’, ‘지금 당장 경쟁에서 이기지 않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그들은 똑같이 “지금처럼 그대로. 원하는 것을 하며 행복하게”라고 말했습니다. 느린 교육으로 아이 키우는 사람들 두 번째 이야기 만나보시죠.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 ‘날라리’
딸 느긋하게 키우는 김 희 씨 ]
 “누가 뭐래도 내 아이를 믿어요”
 맨 얼굴로 밖에 나가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짧은 치마와 한 뼘 높이 킬 힐은 기본. 김 희 씨의 열일곱 살 난 둘째 딸 이유진 양의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책을 읽어도 내용 보다는 그림에 나온 신발이나 머리 모양을 더 열심히 봤으니까요.”
 엄마는 생태해설가, 언니는 반장을 맡아 하는 ‘모범생’이다. 아빠도 ‘날라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유진이는 가족 안에서도 남다른 존재다.

교복치마 줄여주는 아버지 둔 당당한 날라리
 “천천히 키우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어요.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칭찬받고 시선도 받잖아요. 저도 제 아이가 칭찬 받고 자신감 있는 아이로 자라길 바랐죠.”
 그러나 아이는 5학년 때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매우 감각적이고, 지루한 것을 못 견디며 상업적인 문화에 친근감을 느끼는 아이였다. 학업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학교는 좋아했다. 친구들이 있는 곳이었으니까. 부모는 대안학교를 권했지만 싫다고 했다.
“아이가 선택한 방법으로 즐겁게 학교를 다닐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김 씨는 아이의 결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가 가진 욕구를 그대로 인정했다. 믿어주니 아이는 스스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재즈댄스에 관심을 갖더니 혼자서 학원에 등록하고 중학교 2학년 때 까지 배웠다. 좋아하는 것은 열심히 하니 부모는 그 힘을 믿고 기다렸다.
 중학교 시절 유진이의 교복치마는 학교에 가는 길에 입는 짧은 것, 교문 드나들 때 입는 학교 규정에 맞춘 것, 교실에서 편하게 입을 것, 모두 세 벌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쇼핑하며 놀았다. 학생부에 불려가는 일도 허다했다. 이름 하여 날라리. 그러나 다른 ‘날라리’와 다른 점은 치맛단을 줄이고 다려주는 아버지를 두었다는 점이었다. 부모는 남들이 말하는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일등 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딸에게는 같은 길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감당할 수 있다면, 도덕적으로 큰 문제 되는 일이 아니라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두자고 생각했다. 

틀린 건 없어, 다른 것을 선택 했을 뿐
 부모는 이왕에 날라리가 될 거라면 당당한 날라리가 되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옳다고 생각한 대로 하라고.
“유치원 아이들 데리고 생태수업을 할 때 풀 하나 애벌레 한 마리도 소중하다고 하는데 내 아이가 살아가는 것은 안 소중한가요? 틀린 방법이 아니에요. 틀리다고 바라보는 것뿐 이죠.”
 유진이는 얼마 전 “염색은 그만 하겠다”고 말했다. 남들은 이제 막 시작할 때 마지막 염색을 한 것이다. 시험점수 평균 50점. 영어 우열반에서 꼴찌반이지만 주눅 들지 않는다. 요즘은 진로 찾기에 한창이다. 일본의 패션을 공부하고 싶어 일본어를 배워볼까 고민 하고 있다. 부모가 넉넉하게 쳐 준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유진이는 마음껏 자라고 있었다. 아이는 곧 어른이 되고 제 색깔 그대로 세상 속에 섞일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어떤 길을 가든 김 씨는 무조건 아이 편이다.
“옷가게, 음식 가게, 뭐든 괜찮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찾아가리라 믿어요.”


[ 아이 속도에 맞춰 두 아이 천천히 키운 이현숙 씨 ]
 “다그치지 않고 아이 편에서 생각했어요”
 열두 살 난 아들이 말했다.
“엄마는 너무 무관심해!”
11년 뒤 아들은 다시 말했다.
“자라보니 엄마 방식이 참 좋았어.”
그동안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 할 때 까지 기다리며 키우다
 이현숙 씨의 큰 아들 방승현 씨는 1994년에 이름만 쓸 줄 아는 채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이 씨는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이가 모범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떨치지 못했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잘못한 일로 벌을 세우다 이 씨는 문득 생각했다.
“학교에서 안 좋은 마음으로 온 아이를 내가 또 야단친다고 아이가 더 잘 할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다시는 아이를 닦달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시킨 일을 완벽하게 해내라고 요구하고 주입하지 않았다. 일기나 받아쓰기, 독후감도 대충한다고 불러줘 가며 시키지 않았다. 아이가 받아쓰기를 틀려도 ‘6학년 될 때 까지는 해내겠지’ 하며 기다렸다.
 그때도 엄마들의 교육열은 지금 못지않았다. 이 씨는 차 마시며 수다 떠는 엄마들 모임 대신 학부모 단체를 선택했다. 참교육 학부모회 고양지회에 나가 역사 소모임 활동을 하고 부모교육 강좌, 교육 현실을 바꾸려는 실천을 했다. 사회 현실 속에서 아이를 보며,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또렷해졌다. ‘아이 속도에 맞춰 천천히 키운다’, ‘학습에 몰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느긋해졌다. 학원에도 보내지 않았다.
“할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5학년 때부터 아이가 게임을 엄청 했어요. 방학 때면 12시간씩 하기도 했죠.”
 그러나 이 씨는 그냥 두었다. 못하게 하면 몰래 숨어서 할 텐데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게임에서 판타지 소설, 만화로 관심을 돌렸다. 이 씨는 스스로 제어할 때까지 두기로 하고 책보거나 게임하는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 실컷 하고 밤 9시가 넘으면 잠들었다. 고2 때까지 그랬다. 고3이 되자 아들이 말했다.
“이제 공부해야지.”
 그러더니 정말 열심히 했다. 스스로 시간 계획 짜고 안하던 자율학습에도 참여했다. 아들은 정치외교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이제 스물세 살이 된 아들은 말한다.
“엄마가 다그치면서 키웠으면 난 정말 안 좋았을 거예요.”
엄마도 생각한다.
‘그래. 스스로 하도록 그냥 두고 기다리길 참 잘했다.’

저마다 다른 아이 존중하고 따라주는 엄마
 둘째 딸 승혜는 또 달랐다. 큰 아이와 달리 욕심이 많았다. 몇 번 부딪힌 다음에는 ‘얘야 말로 가만히 놔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성적이라 초등 1학년 때는 발표를 안 한다고 담임교사에게 연락이 오기도 했다.
‘나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게 힘든데 얘는 오죽 하겠나. 안 해도 할 수 없고 때 되면 할 수도 있지’ 하며 놔두었다.
 열일곱 살 승혜는 엄마의 방식이 마음에 든단다. “다른 친구들은 학원 다녀라 뭐 해라 부모님한테 강요당하고 끌려 다녀요. 저는 하고 싶은 일 한다면 ”그래라“ 하시니까 좋아요. 그게 저한테는 더 좋은 것 같아요. 어차피 제 인생이니까요.”
아이랑 부딪치는 대신 이 씨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는 참교육 학부모회 활동을 하며 사회에 관심을 갖는 모습이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 소모임을 하며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공부하라고 하는 것 보다 더 큰 말이 되어준 것 같다고. 아이들을 변화시키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변하려고 했고 특별히 계획하기보다 그대로 두고 키우려고 했다. 그래도 여행만은 자주 다녔다. 남편도 여행을 좋아해 방학이면 가족이 함께 즐겼다. 주말에는 박물관 같은 곳 보다는 들로 산으로 돌아다녔다.
 그는 요즘도 참교육 학부모회에 열심이다. 주로 부모 강좌 쪽에 힘을 쏟고 있다. 부모가 변해야 아이가 변한다는 생각에서다.
“요즘 부모는 오로지 내 아이 뿐이에요. 아이들한테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이에게 매여 있으면 아이가 크기 어렵죠.”
철없다고 보는 것은 어른들 생각일 뿐. 아이들은 나름의 생각이 있으니 믿고 따라주라고 ‘느린 엄마’ 이현숙 씨는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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