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세상으로 가는 징검다리 놓을래요
‘공정한 사회’라는 말이 회자된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지구 한 편의 누군가 쌀 한 톨 아쉬워 굶고 있을 때, 또 다른 누군가는 먹을 것이 넘쳐 병드는 것이 세상의 모습이기에 씁쓸한 여운을 주는 말이기도 하다. 제가 만든 진창길에 제 발목이 빠져 어른들이 허우적거리는 동안, 그래도 공평하고 올바른 세상은 가능하다며 징검다리를 놓는 청소년들이 있어 만나보았다.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장함공동체’의 지역아동센터 중고등부 학생들과 교사로 구성된 봉사 동아리 ‘아주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공정 무역 생산지에 여행 다녀와 만든 봉사 동아리
힘들게 찾아간 언덕 위의 칼리카학교에서 만난 아이들과 함께
처음부터 봉사동아리를 만들 계획은 없었다. 지역아동센터에 나와서 공부도 하고 초등학생 동생들을 돌보기도 하던 이들이 지난해 아름다운 재단에서 ‘아동 청소년 여행 지원 사업’에 지원하면서 일이 시작되었다.
“어떤 여행을 할까 의논하다가 생협 소식지에서 ‘공정무역’이라는 말을 보게 됐어요. 쌤(선생님)한테 공정 무역이 뭐냐고 물어봤죠. 듣고 나서 생산지에 직접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최종덕. 백마고 3학년)
‘공정무역. 그리고 아.주.나 되기’라는 이름으로 여행지원 사업에 공모한 이들은 생산지 주민들의 삶을 함께 나누고 봉사 활동을 통해 꿈과 희망을 찾겠다는 목표로 8월 3일부터 13일까지 네팔 일대를 여행했다. 공정 무역 홍차 생산지인 네팔 동부의 피딤 지역을 방문해 홈스테이를 하면서 홍차를 땄다. 도서관과 학교를 방문해 태권무 공연을 하며 한국 문화를 소개했다. 가지고 간 한국 음식들로 ‘한국 음식의 날’을 만들고 홈스테이 가정의 대표들을 저녁에 초대하는 작은 잔치도 열었다. 차 생산 공장을 들러 공정무역 파티도 열고 카트만두의 고아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다.
교사 2명을 포함하여 참여한 인원은 모두 12명. 적지 않은 인원이 짧지 않은 기간에 쓴 여행 경비는 모두 1천 6백 여 만원. 아름다운 재단 지원금 7백 만 원을 빼도 9백 만 원 가량을 모아야 했다.
“장함공동체에서 동아리로 지원되는 금액은 한 달에 십 만원이 전부예요. 나머지는 회비, 그리고 전액 기부로 충당했죠. 아이들이 직접 사업 기획서를 들고 일가친척, 아는 사람을 모두 만났죠. 3주 만에 860만 원을 모았어요.”
장함공동체 지역아동센터를 맡고 있는 지도교사 정광호 씨의 말이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이랑 선생님들한테 공정무역 커피를 팔아 후원금으로 모았어요. 반응이 좋았죠. 친구 부모님들이 사주기도 하셨어요.” (이태진. 백마고 3학년)
3주 만에 860만원 모금, 경비에서 진행까지 학생들이 스스로
모금뿐이 아니다. 자료 수집에서 여행 일정 준비, 현지 교통편과 숙박 정보에서 여권과 비자 준비까지 모두 청소년 회원들이 직접 준비했다. 공정무역과 네팔 현지 상황에 대한 강좌, 태권무 배우기, 프로그램 준비물 제작도 모두 나누어 일했다. 여행 발표회와 보고서도 역시 회원들이 스스로 했다. 학생들은 각자 관심을 두고 있던 영역의 일을 맡았다. 좋아하는 일을 신나게 하는 동안 배움은 저절로 일어났다.
회계를 담당한 정용탁(풍동고 3학년) 군은 “한번 쯤 회계 관련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경험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일일 카페에서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경험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정 군은 유니세프 같은 단체에 가입해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손글씨 디자인이 취미였는데 네팔에 가면서 맞춰 입은 단체 티에 제가 만든 디자인이 프린트 돼서 입고 갔어요. 뿌듯했죠. 용기도 얻고 제가 많이 달라졌어요.” (김지수. 용호고 1학년)
“꿈이 없었거든요. 여기서 해외 봉사를 해보고 싶은 꿈이 생겼어요.” (장은비. 원당중 1학년)
지도교사 정광호 씨에게 힘든 점은 없는지 물었다.
“일이 많다는 것이 어려움이죠. 하지만 근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다행히 집이 가까워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요. 새벽에 퇴근하지만 아이들 성장하는 모습 지켜보면 보람있어요.”
장함 공동체에 들어오기 전, 정 씨는 방송 관련 일을 하며 자원봉사 활동을 꾸준히 했다. 그는 노숙인, 장애인, 이주 노동자와 함께 하는 장함공동체의 활동에 힘을 보태려는 꿈을 안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자원교사 김미혜 씨는 정 씨와 대학 시절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만난 사이로 전국자원봉사대회의 고등학생 수상자 출신이다. 자문위원 이진수 씨는 수지무역대표이사로 아이들이 영어로 이메일을 보내거나 사업 진행에 도움을 주었다.
여행길이 배움터, 살아있는 경험 계속 나누고파
아주나 회원들은 네팔에 다녀와 경험을 나누기 시작했다. 누군가 동아리를 만들어 계속 활동 하자는 제안을 했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회원은 14명으로 정기 봉사와 기획 사업을 진행한다.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는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소개하며 자립과 자활을 돕는 ‘거리의천사들’ 활동을 한다. 올해의 기획 사업은 ‘아주나 씨앗을 심다’로 지난해 다녀온 네팔의 공정무역 생산지에서 일하는 노동자 4명을 초청한 프로그램이다. 아름다운 가게 등 공정무역 판매처를 둘러보고 한국의 문화를 소개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변화는 많았다. 물건을 살 때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한 번 더 살펴보게 되었다는 이동우(백마고 2학년) 군, 이주민 노동자와 자녀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는 박해연(백마고 2학년) 양의 이야기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윤리와 도덕을 이미 넘어서 있었다.
“앞으로 의미 있는 봉사 활동 많이 하고 싶어요.” (류지혜. 백마고 2학년)
“고등학교 올라오면 다들 공부하느라 바쁜데 여행 다니고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아주나에서 경험한 것이 사회에 나가서도 쓰이게 하고 싶어요.” (전유정. 풍동고 1학년)
전유정 학생의 말처럼 아주나에는 함께 봉사하고 여행하는 친구가 있다.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나무도 소년에게 친구였다. 나무는 소년에게 바라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나무 둥치로 남더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아주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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