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자연환경과 좋은 재료…인내가 더해져 탄생한 명인의 장
용인시 백암면 박곡리, 맑은 공기와 1급수의 시내가 흐르는 조용한 시골마을엔 언제나 구수한 장이 익어간다. 투박한 항아리 안에서 묵묵히 세월을 견디어 탄생한 된장, 간장은 더 이상 음식이 아니라 보약의 기운을 만들어 낸다. 얼마 전 농림수산식품부의 경기도 궁중장 ‘식품명인’으로 탄생한 권기옥(77·용인 백암)씨가 운영하는 상촌식품의 풍경이다.
조선 시대부터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주로 이용한 고급스러운 장(醬)인 어육장 제조 비법을 3대째 계승해오고 있는 그이. 다소 늦은 나이인 50을 넘겨 불현듯 ‘내가 하지 않으면 전통 장이 사라지고 말지’ 라는 의기의식을 느꼈단다. 그렇게 고희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그이가 장과 함께 익어가는 시간이 시작된 계기다. 아직도 장에 대해서라면 태산같이 할 일이 많다는 그이의 구수한 장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옛 궁중 수라상에 오르던 어육장 복원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그 옛날 궁중이나 사대가에서 즐겨 먹었다는 어육장. 말 그대로 고기와 생선을 메주와 함께 담궈 장이 될 때까지 묵혔다 꺼내 먹는 귀한 장이란다.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귀한 장을 외할머니와 어머니에 이어 3대째 이어오고 있는 권기옥 명인.
“어육장은 아직 일반인들에게도 생소하잖아요. 그만큼 보급도 안 돼 있어 대가 끊어질 거라는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들었고 그때부터 아무 기반 없이 무작정 장을 담그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당시 용인시에서 향토 음식을 발굴하고 전통을 육성하던 때라 시의 도움으로 건물도 짓고 장을 만들어 알리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시작한 장담구기 행보는 95년, 상촌식품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전통 장을 보급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회사를 운영하며 장을 알리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최고의 국산 재료를 쓰고 있지만 정작 시장에서는 비싸다는 이유로 외면 받고, 가격 경쟁률에서 승산 없는 패배를 수없이 경험해왔단다.
방부제나 첨가물을 하나도 넣지 않으니 더운 날씨엔 발효가 더 진행돼 거품이 생겨 반품이 들어온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사명감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두 손 두 발 들고 나왔을 이일을 무던히도 견디며 헤쳐 나왔다.
식품 명인에 도전한 것도 이런 힘겨움을 뚫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전국에 내로라하는 식품 달인들이 참가해 경연을 벌이고 또 1년간의 까다로운 심사과정을 거쳐 궁중장 식품명인으로 탄생된 것이 올 4월. 하지만 명인이 되었다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특별히 지원금이 있거나 세금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명예라는 타이틀만 얻은 것.
“오히려 외국 바이어들이 우리나라 간장, 된장을 더 좋아하고 으뜸으로 인정해 주세요. 발효식품의 우수성에 최고의 감탄사를 보내주시죠”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군다’ 속담에 얽힌 불편한 진실
이쯤해서 아까부터 항아리가 세워져 있던 온실 하우스가 궁금했다. 이유인즉 장 담군 항아리를 바깥에 놔두면 파리가 냄새를 맡고 무서울 정도로 꼬인단다.
“아무리 뚜껑을 닫아놔도 기어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알을 낳고 구더기가 꼬이게 되 있어요. 어쩌다 TV에서 드넓은 항아리에 된장독들이 아름답게 펼쳐진 장면을 보여주곤 하는데 대부분은 빈 항아리일 거예요. 정작 장이 들어있는 항아리는 그렇게 한데다 놔두면 구더기 때문에 못 먹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집에서 조금 담궈 먹는 것도 구더기 때문에 어려운데 수백 개의 항아리들을 늘어놓은 화면의 진실이 무엇일까 웃음으로 대신하는 권기옥 명인.
그래서 이곳의 된장, 간장 항아리들은 모두 온실에 들어가 있다. 유리로 둘러싸인 높다란 천장과 옆으로는 통풍이 가능한 방충망이 설치된 권기옥 표 ‘장 익는 온실’이다.
50여개의 항아리들은 관리도 까다롭다. 아침마다 들어가 항아리 뚜껑을 열어주고 햇빛과 바람을 쐬어 주고 장이 익어 양이 줄어든 간장에는 첨장을 해주며 세월에 농익은 장맛을 탄생시킨다.
그렇게 익은 장들은 담구는 방법과 시간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메주를 두 번 담구는 덧장, 묵혀서 10년이 넘은 꽃장, 육해공의 재료가 들어간 어육장 등이다. 최근에는 추석을 앞두고 권기옥 명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5개의 궁중장 세트가 백화점에 출시 되었다.
“아직은 백화점에, 그것도 비싸게 나갈 수밖에 없지만 조금 더 대중화 시키고 가격도 낮춰서 많은 사람들이 어육장을 접해보도록 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때까지는 건강을 잘 유지해야겠지요. 하하하”
문의 031-332-4289
권미영 리포터 myk31@paran.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