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세요, 나의 나비는 날고 있어요”
장항동 그 집을 찾았을 때, 하얀 강아지는 낯선 사람을 보고 많이도 짖어댔다.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라는 주인의 말에 떨리는 손으로 몇 번 쓰다듬었을 때, 강아지는 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다 느끼거든요. 자신을 무서워하는지 귀여워하는지.”
부끄러웠다. 이 나이에 개를 무서워 한다는 걸 다 들켜버렸구나, 싶었다. 한국의 피카소를 꿈꾸는 발달장애 화가 김범진 씨의 집에서였다.
발달장애 아들의 특별한 재능 알아본 어머니의 헌신 속에 성장
2005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축복 받은 천재들의 초대>에 출연하여 세상에 알려진 범진 씨는 그새 일산정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물두 살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그는 발달장애와 함께 천재성을 갖는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으로 그림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최인호 작가의 소설 ‘상도’의 청소년 판에 삽화를 그려 주목받고 있다. “내가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2년 전쯤 김범진 군의 그림을 본 직후였다. 잘 아시다시피 김범진 군은 자폐아로, 정신적 장애자였는데, 어느 날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김 군이 <상도>의 한 장면을 삽화로 그려 그 그림을 가져온 것이다. 그 그림을 본 순간 나는 전율하였다. 천재의 손길을 그의 그림 속에서 느꼈던 것이다. 나는 김범진 군이 각 권마다의 삽화를 그려줄 수 있다면 <청소년 상도>를 펴내도 무방하다는 조건부 허락을 했다.” 작가 최인호 씨는 김범진 씨의 그림을 본 순간, <청소년 상도> 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며 이렇게 고백했다.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남다른 아들. 그러나 일반적인 방법으로 소통하기 어려운 장애를 가진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낸 어머니가 어쩌면 더 특별한지 모른다.
“네 살 때부터 그림 그리는 선이 굵고 힘이 넘쳤어요. 한동안 차에 관심이 많아 여러 각도에서 차를 그렸죠. 앞에서 본 모습을 그릴 때는 꼭 달려오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 황진오 씨는 아들이 처음 그림 그리던 시절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로 그은 듯 반듯반듯하게 그려진 주차장과 자동차를 보았을 때 미술에 특별한 능력을 지닌 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을 배우러 가지는 않았다.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교감이 되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도 잘 구분하여 부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자폐에 대해 아는 선생님을 만날 수가 없었고 잠깐씩 화가들을 찾아가기도 하다 그만두었다. 범진 씨가 가진 나름의 독특함을 잃어버릴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몇 년, 로봇 몇 년, 공룡만 몇 년 씩, 그림으로 그렸어요. 혼자서 참 많이도 그렸어요. SF영화 장면도 그리고요.”
피카소가 되고 싶은 청년 화가, 세상 속으로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지금의 선생님을 만났다. 정발산동에서 <그림이야기>를 운영하는 이재연 씨였다. 장애아와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림에 손대기 보다는 살리는 쪽으로 지도를 하는 그의 방식이 범진 씨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 준 셈이었다.
“다른 발달장애아들과 다른 창의력이 보였어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작가적인, 내면이 표출된 그림이 나오는 경향이 있는 거죠.”
사람들은 장애아에게 남다른 철학이 있을까, 혹시 지도하는 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일반 아이들한테는 나비가 살아 날아가는 듯 그리고 싶으면 선을 가볍게 했다가 굵었다가 하면 된다고 얘기해줘요. 범진이는 그게 통하지 않아요. ‘선 속에서 움직임을 주면 어떨까?’라고 말하면 ‘아니요 저는 움직이고 있어요’ 라고 말해요. ‘나의 나비는 날고 있어요. 보세요, 날개가 이렇게 벌어졌잖아요’라고요. 제가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이렇게 생명을 불어넣어야지 했던 건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죠. 범진이의 생명력은 질서예요.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감동을 받아요.”
드라마로 방영된 바 있는 최인호 씨 원작의 <청소년 상도> 삽화 작업을 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드라마를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래 품을 들였다. 드라마의 장면마다 다운 받아 보여주었다. 신용복, 김정희의 그림을 모사해 그리기도 하고 그 시대의 책이나 그림을 보고 쓰던 도구들도 그려보았다. 시대물을 소화할 수 있도록 밑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내면적인 것이 나타나게 그리는 작업은 힘들었지만 범진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피카소도 그림을 하나 하나 그리면서 힘들었겠군요. 저도 힘들지만 커서 피카소처럼 될래요”라고 말하며 긴 작업의 어려움을 이겨냈다.
2008년 예술 아르떼〈피카소를 꿈꾸는 자폐 소년의 전시회>, 고양 어울림 누리 <더불어 숲이 되자>, 2009년 세종문화회관 별관 <소리없는 울림 전> 등 전시회를 갖고 어엿한 화가로 성장한 범진 씨. 발달장애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지난 시절을 돌아볼까.
“장애아라는 걸 아는 순간 깜깜해졌죠. 서른 살에 낳았는데 30대가 뻥 뚫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았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나요.”
기대보다 훨씬 더 좋아져서 감사할 일이 많지만 가끔 남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왜 안될까요? 나는 왜 못할까요?”라고 말할 때면 어머니 황 씨는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다. 욕구와 자존심이 있으나 뜻대로 즐기지 못하는 아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지만 그이는 혼자 고민하지 않는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의 모임 <기쁨터>에 참여하면서 함께 살아갈 마을을 준비하고 있다.
“장애를 가진 부모들은 단체나 모임으로 나가야 해요. 혼자 있으면 지치고 어두워져요. 여럿이 함께 세상으로 나와야 부모도 아이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장애는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요. 밝은 곳으로 나가야죠.”
이렇게 말하는 황진오 씨의 얼굴에는 밝은 기운이 가득했다. 깜깜한 시절을 통과한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빛일지도 모른다.
“일반 아이는 이렇게 저렇게 자라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으니 실망하고 갈등도 생기죠. 장애아를 키우는 일에는 어떤 기대감이 없어요. 있는 그대로 돌봐주고 키우니까 너무 사랑스러워요. 기대감 없이 키우니 마냥 귀엽고 천사 같아요. 그렇게 바라 볼 때 타고난 성품 그대로 다치지 않고 자라는 것 같아요.”
부모의 욕심 없이 키울 때 스스로 빛나는 것이 장애아뿐이랴. 세상 모든 아이들이 타고난 재능 그대로 인정받아 피어나기를 바라며 화가의 집을 나섰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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