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에겐 하늘과 바람, 산천이 모두 詩
“이 멀디먼 촌 구석, 솔방울 굴러가는 소리를 뭐 들을게 있다고 찾아와~!”
용인 원삼면 고당리 작은 시골마을의 홍사국(67)시인은 그렇게 먼 곳까지 찾아와 준 리포터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주며 겸연쩍어했다.
용인의 소규모 읍내에서 농기구 수리도 하고 조금 멀직히 떨어진 곳에서 60마지기 논농사며 고추농사 지으며 살고 있는 그는 여러 말이 필요 없는 시골 농부다.
찾아간 손님 앞에 겸연쩍게 내미는 시집이며 문학동인지를 보고 나서야 그가 오래전부터 시를 써온 향토 시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확인된다.
“고향은 안성인데 군대 제대 후 76년에 용인으로 내려와 40년 세월을 살았지. 시골사람 못 고치는 농기계 고장 나면 고쳐주는 기술자로 살았고 내내 농사지으며 그렇게 살아왔지 뭐. 시는 제대 무렵부터 써왔으니 아마 45년쯤 됐을라나?”
아무렇지 않게 불쑥불쑥 내던지는 그의 투박한 말투에서도 시(詩)에 대한 무심한 애정이 느껴질 즈음, 여기저기를 뒤지며 색이 바랜 오래된 습작 시들을 꺼내 놓는다. 불현듯 시 한수를 낭독하며 자랑하듯 던지는 말.
“어때 참 좋지? 이런 시들은 내가 봐도 흐믓해.” 먼 곳까지 오지 말라던 겸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동안 써온 작품들을 하나둘 꺼내 보여 주는 모습이 흡사 어린아이와도 같다. 그렇게 40년 세월 이러 저리 뒹굴며 없어진 시들 말고도 족히 400편이 넘는 작품들. 지인 한명이 그렇게 사장되는 시들이 아깝다고 자꾸 성화를 부려 얼마 전 ‘잔디의 노래’라는 시집을 내게 되었다.
용인을 노래하는 농부 시인
“백성의 소리라는 뜻이여. 내가 농사짓고 사는 민초 잖어. 살아온 시절, 그때 그 마음을 남겨 놔야겠다고 생각해 시를 쓰기 시작 한거야. 주변을 보면 하늘도, 바람도, 산도 모두 시가 되잖아요? 허허”
그렇게 농부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연은 한 폭의 시가 되기에 충분할 만큼 가슴속에 따뜻한 시선을 품고 살았던 그. 오래된 향토 문학회 ‘용인문학회(회장 김종경)’의 창단 멤버이기도 하다.
“산수 좋고 공기 맑아 오색 꽃 피면 향기 속 나비 춤추는 사랑의 도시랍니다. 마주 잡는 손길마다 사랑이 가득하고요. 서로 돕는 마음속에 행복이 솟아나지요. 고향 할머니 인정 넘친 백옥살이 맛도 좋아라. 새벽 샛별 방긋 웃는 용인에서 살리라.”
‘용인찬가’라는 시에서 보듯 화려한 미사여구와 어려운 문필로 애써 치장 하지 않는 그의 시는 쉽고도 정겹다.
40년 농사지으며 자식들 키워내고, 시집 장가보낸 후 노부부만 살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과 넉넉한 인심 나누고 사니 용인은 제 2의 고향이다. 그런 용인을 어떻게 노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홍사국 시인에게 용인은 시를 만들게 하는 발원지다.
사라진 마을 돌장승, 새로 깍아 마을에 기증
사진을 찍자고 부탁하니 너른 들판 가득, 온통 초록으로 넘실대는 논밭을 보여주며 홍사국 시인은 자연에 대한 소박한 예찬을 펼쳐 보인다. 우렁이 농법으로 14년 전부터 친환경 벼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 그가 자랑하는 넓은 논바닥에는 아이 주먹 만한 우렁이가 지천이다.
“얼마나 이뻐. 이렇게 잘 자라주니 말이여. 우리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조금 고되도 농약 안 쓰고 길러야 해. 쉽게 가자고 농약 쓰면 병원에 갖다 주는 돈이 더 들지.”
시골구석까지 찾아와 준 리포터에게 솔방울 구경시켜 준다며 달달거리는 트럭에 태우고 이논 에서 저 논으로 구경시켜주는 홍사국 시인. 문득 커다란 나무 아래 차를 멈추고 땅에 떨어진 개살구를 슥슥 문질러 권해준다.
“이런 걸 먹어야 제 맛 인거야. 시골에는 이렇게 눈만 돌려보면 죄다 시가 되는 것들뿐이야.”
농부 시인을 좇아 한적한 시골 마을을 돌다보니 문득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시(詩)’의 장면과 묘하게 겹쳐져 그저 신기할 따름.
영화 얘기를 묻자, “뭐 우리같이 농사짓는 사람이 한가로이 영화 볼 시간이나 있나?”라고 응수하지만 그의 삶 자체는 이미 영화처럼 닮아 있었다.
손재주가 좋아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해오던 돌비석 ‘미륵댕이’를 도난당하고 아쉬워하는 마을 주민들을 위해 몇 해에 걸쳐 돌장승을 다듬고, 기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단다.
“내가 촌구석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용인문학회 회원이잖어. 매월 첫째 월요일에는 모임에 나가 낭송회도 하고 시 공부도 하고 있어요. 가끔씩 회원들하고 메밀꽃의 고장 봉평도 가고, 또 더러는 낚시도 다니고 그렇게 늘그막에 호사도 누리고 살아요.”
예상치 못한 집안 일이 생겨 서둘러 돌아가야 하면서도 먼 길 찾아와 준 손님에게 점심 대접도 못했다며 내내 미안해하는 시인.
“있잖아요. 언제고 꼭 한번 다시 들러. 내 맛난 밥 대접 할 테니께.” 농부 시인의 신신당부가 멀어지는 차 뒤에서 두고두고 맴을 돌았다.
권미영 리포터 myk3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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