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 성찰의 시대를 열다
“민주주의 최후 보루는 시민”
500만명 조문행렬 이끌었던 ‘존재론적 질문’ 촛불-금융위기 거치며 ‘삶의 질’로 중심이동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직전 출판된 자신의 저서를 통해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시민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제헌헌법을 통해 ‘공짜’로 주어진 민주주의는 ‘후불’을 요구한다는 논리였다. “이명박정부의 문명 역주행”을 강하게 비판했던 유 전 장관은 물론 출간 직후 책을 샀던 이들도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후불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 서거는 한국 민주주의 후불의 시작”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노무현과 그의 죽음은) 역사와 씨름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비춰보는 위대한 거울”이라고 평가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한국사회와 국민들에게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플랫폼’ 삼아 참여정부의 공과를 분석하고 한국사회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는 제안도 내놨다. 반면 “시대의 짙은 어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노무현은 뜬금없는 자살자”이며 “자살충동을 부추기고 국가의 품격과 위신을 실추시킨 사람일 뿐”이라고도 했다.
김 소장의 지적대로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한국사회에 존재론적 질문을 던졌다. 장하진 한국미래발전연구원장의 말대로라면 “국민들이 먹고살기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것도 힘없는 보통사람들이 살기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국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이다. 서거 당시 많은 추모객들이 “가슴이 먹먹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민주주의’는 500만 추모행렬이 던진 존재론적 질문의 중추였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정치학 박사는 “추모객들이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외친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를 함께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의미가 있다”며 “노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일깨운 것은 민주주의의 소중함”이라고 말했다.
◆UN보고관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는 위축”
일반적으로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됐느냐를 보는 가늠자는 정기적인 선거가 치러지느냐다. 관권과 금권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지 않은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가 정착됐다고 본다는 것이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천부인권의 문제를 제기했다. 사상·집회·결사·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같은 것이다. 특히 ‘표현의 자유’는 실질적 내용적 민주주의의 정착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현실은 민주주의 발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미네르바 사건, 전교조 시국성명 사법처리, MBC PD수첩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5·18 30주년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금지한 것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경우로 분류된다.
이미 프랑크 라뤼 ‘UN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어 있다”고 우려를 표시한 것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소통부재와 밀어붙이기식 국정운영이라는 오류를 넘어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 근본 정신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이유다.
◆“민주주의 방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
고성국 박사는 “민주주의는 공기처럼 정착이 되면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없으면 고통스러운 것”이라며 “조금씩 위축되던 기본권의 문제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일깨워졌다”고 덧붙였다.
정해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도 “상당 정도 그 발전을 이룩했다고 자부하고 있던 한국 민주주의 수준을 새삼 돌아보게 됐다”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그것을 방어하는 것조차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측면에서 노 전 대통령의 비석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문가들은 ‘성찰’의 결과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를 내렸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는 “노 대통령 서거가 모멘텀이 될 수는 있지만 변화 자체를 스스로 만드는 계기가 될 수는 없다”며 “변화의 시기에 힘을 보태는 역할을 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권과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복지정책의 중요성 다시한번 돌아보게 했다”며 “지방선거에서 강한 노풍이 불지는 않을지라도 마음 속의 노풍은 잔잔하게 흐를 것”이라고 말했다.
허신열 기자 syhe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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